아직까진 정신줄 잘 붙잡고 밥 잘 먹고 있습니다.
원래 <만두박사의 정치학 산책> 속 '폭력' 회차의 에필로그로 들어갈 글을 나눠 올렸습니다.
폭력과 침묵에 대해 글을 쓰는 내내 두 가지 고민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답니다. 하나는 제 전공분야에 대해 쓰는 만큼, 신나서 막 떠벌리지 않고 제일 쉽고 간결하게 주제의 핵심만 전달할 수 있을까-였고 (써놓은 걸 다시 읽어보니 잘 안된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주제를 쉽고 간결하게 쓰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라는 고민이었습니다. 이런 고민엔 보통 명쾌한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에라 모르겠다 쓰기도 했고
아주 심지가 굵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람이 사람을 해치고 억압하는 걸 가까이 관찰하는 건 심적으로 몹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소말리아에서 연구를 하는 한 친구는 하루 종일 울리는 총소리, 그리고 현장에서 내전의 피해자들을 만나 증언을 채집하는 일을 하며 마음속에 큰 부담이 생겼다고 합니다. 저는 국가기록원에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을 읽으며 마치 마음속에 돌덩이가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계속 느끼고 있습니다. 저와 같이 내전, 폭력, 평화 등등을 공부하는 친구들은 연구 도중 느끼는 아픔과 부담을 어떻게 해소할 건지에 대해 서로 묻기도 합니다. 아직 답을 찾은 친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증인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디테일을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피해자들은 군인들을 피해 황급히 도망쳐 나와 뛰어든 한겨울 눈밭에 손발이 꽁꽁 어는 느낌, 한여름 사라진 가족을 찾아 헤맬 때 손에 닿는 여러 가지의 촉감과 뜨거운 햇빛, 그리고 그 와중에도 몹시 향기로웠을 늦여름 풀내음을 그대로 전하려 노력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듣다 보면 마치 제가 그 현장에 와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증인들이 현장에서 느낀 그 감정과 감각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저는 한동안 잠자리에 누우면 콧구멍에 여러 가지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은 내음이 스치는 듯하고, 귀에는 총성과 비명소리, 아이들 우는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느낌이 들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정말 솔직히 말해,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닙니다. 뭔가 큰 동기부여 없이는 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토론토 대학교에는 저 말고도 내전과 평화, 그리고 정치폭력에 대해 연구를 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중엔 총을 들고 내전에 직접 참여했던 친구도 있고, 정치적 억압을 견디다 못해 도망 와 난민신청을 한 친구들도 있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이 걱정돼 대놓고 말을 하진 못 하지만, 모국의 자유화를 위해 공부를 하는 친구들도 있답니다. 나름 굳은 심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몹시 어렵고 마음 아픈 주제를 공부를 한다고 봐야겠습니다.
그 친구들에 비하면야, 저는 뭐... ㅎ_ㅎ 제 (사명감이라 하기엔 좀 많이 쑥스럽고) 동기는 좀 시시껄렁합니다. 저는 이 공부를 하며 "교수직이니, 학계니는 사실 뒷전이고, 다시 현장에 돌아가 전쟁의 상흔과 씨름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종종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박사 지원할 때 이 말을 그대로 지원동기서에 썼다가 학교 두 군데 빼고 다 빠꾸 먹는 심장 떨리는 일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때 그 시절의 경험은 제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일이니(...) 차차 시간을 가지고 쓸 일이 있겠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사람들의 고통과 침묵을 기록하고 정리해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겠죠. 그래야 또 상처가 아물며 용서니, 화해니, 하는 보기 아름다운 일들도 일어날 수 있겠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작업을 하는 "누군가"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속에 저도 꼽사리를 낄 수 있다면, 그것도 또 그거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직 정신줄 꽉 붙잡고 있습니다. 밥도 잘 먹고 장학금 신청도 제때 잘한답니다. 이제 논문만 쓰면 됩니다. 논문만 쓰면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