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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박사 Jun 22. 2020

폭력 - 삶과 죽음의 정치

정치가 사람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는 과정 -1-

Sun, why are you shining at this world? I am wanting to catch you in my hands, to squeeze you until you can not shine no more. That way, everything is always dark and nobody's ever having to see all the terrible things that are happening here.

(햇님, 왜 이런 세상을 빛으로 밝혀줍니까? 내 손으로 너를 잡고 싶습니다. 네가 빛나지 않을 때까지 손으로 꾹 쥐고 싶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깜깜해지면, 아무도 이 곳에서 일어나는 무서운 일들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
<국적 없는 짐승들> 中


시작하기 전에: '폭력' 회차는 몹시 잔인하고 마음아픈 사례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만큼, 읽기 전에 주의를 요합니다 (성폭력, 살인 등)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며, 정치는 폭력을 동반합니다. 한정된 자원을 분배할 법칙을 만들 힘(또는 권위)을 가진 사람은 보통 그 힘을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수단 또한 가지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수단은 지극히 폭력적입니다. 


국가를 예를 들어 봅시다. 국가는 그들이 만든 규칙을 어긴 사람들을 잡아 가두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 신체에 해를 가하거나 목숨을 빼앗기도 합니다. 우리가 국가에 (대체적으로) 충성하는 이유는, 물론 국가라는 테두리가 우리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국가는 통제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수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폭력은 국가의 통제가 무너진 내전 상황에서 제일 극단적인 형태로 자주 나타납니다. 국가가 무너진 상황에서 다시 정치적 권위를 세우려는 사람들, 중앙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거나 또는 중앙 정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찍어 누르는 사람들 간 다툼의 과정을 내전이라 부르겠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는 '전쟁 행위'를 한참 벗어난, 차마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행동이 계속 나타납니다. 




"잔혹한 폭력의 향연"


이런 폭력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걸까요?  몇몇 학자들은 폭력 그 자체를 탐닉하는 사람들이 이런 폭력을 부추긴다고 봅니다. 제레미 와인스틴(Weinstein 2007)은 재원을 손쉽게 약탈할 수 있는 여건 속에서 조직된 무장단체는 세를 빠르게 불리기 위해 금전적 유인책을 사용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전적 동기로 모인 사람들은 정의니, 옳음이니 등 골치 아픈 것보단 얼른 한탕 벌어서 나갈 생각으로 가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폭력은 그저 자기 잇속을 채우기 위한 도구일 뿐이겠죠.


비슷하게 존 뮬러(Mueller 2000)도 르완다 내전과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비교하며, 두 전쟁 모두 총을 들고 한탕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무장단체들의 핵심을 이뤘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이끌며 학살과 인종청소를 자행했던 제이코 라즈냐토비치는 수십 번의 강력범죄 전과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끌던 민병대도 폭력적인 축구 훌리건들이 그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뮬러는 이런 사람들이 이끄는 전쟁은 잔혹한 폭력의 향연일 뿐이며, 이런 행위는 전쟁이 아닌 범죄나 다름없다고 얘기합니다.


제이코 라즈냐토비치와 그의 민병대 (Ron Haviv / VII Photo)


"무질서 속의 질서"


하지만 폭력은 그저 질 나쁜 사람들이 잇속을 챙기기 위해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무질서해 보이는 잔혹한 폭력에도 질서와 이유가 존재합니다. 파트리시아 베이츠만(Weitsman 2008)은 보스니아 내전에서 세르비아 민병대들이 저지른 여성 집단강간은 그저 폭력을 위한 폭력이 아니라, 강간을 통해 여성들을 임신시켜 상대 민족에게 잊히지 않을 치욕을 안기고, 또 비 세르비아 민족의 혈통을 보스니아에서 생물학적으로 밀어내기 위한 행위였다고 말합니다. 임신을 한 피해자들은 의료진들에게 진찰을 받으며 좋은 음식을 공급받았고, 만삭이 되면 (즉, 낙태를 하지 못할 지경으로 배가 불러오면) 풀려났습니다.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폭력적인 행위로 생산된 아이들은 출생 직후 어머니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공동체 속에서 혐오와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욕받이 아이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라 코헨(Cohen 2013)은 전쟁 중 일어나는 집단강간과 같은 극단적인 폭력은 집단의 연대감을 기르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코헨은 시에라 리옹 내전을 연구한 바, 병사를 납치하는 등 강제로 징집한 무장단체들이 집단강간을 저지를 확률이 현저히 높았으며, 남성 병사들 뿐만 아니라 여성 병사들도 이런 행위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 어찌나 깊은 연대감이 생겨났는지, 집단 강간을 저지른 무장단체 소속의 병사들은 그렇지 않은 단체의 병사들보다 전쟁 후 서로 주기적으로 만나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확률이 몹시 높았습니다. 심지어 혈연으로 엮인 무장단체들보다 그럴 확률이 더 높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모든 폭력에는 나름의 이유가 존재합니다. 따라 스타디스 칼리바스(Kalyvas 2001)는 현대 내전의 잔혹함에 집중하는 학자들을 비판하며 이런 폭력은 어느 내전이든 다 있어왔고, 우리가 무질서라 여기는 폭력에는 모두 치밀한 논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2006년 저서를 통해 내전 중에 일어나는 폭력 행위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전을 이기기 위한 점령지의 통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노용석(2005) 또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을 관찰하며 당시 한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은 '빨갱이'와 '비 빨갱이'를 나누어 통제해 새로이 수립된 정부의 권위를 극대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빨갱이'라 불린 사람들이 모두 소멸되고, 쉽게 이해하지 못할 논리로 동네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살해당하는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사람들은 '빨갱이'를 본인이 소속된 국가의 적으로 인식함과 동시에, 본인은 기필코 (국가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며) '빨갱이'로 낙인찍히지 않겠다는 심리*를 심었다고 합니다. 


*이런 '빨갱이' 히스테리가 전후 한국사회에 어찌나 널리 퍼졌는지, 전후 몇십 년간 심리 병동에서는 "빨갱이가 나를 잡으러 온다" 내지는 "누가 나를 빨갱이라 밀고하려는 것 같다"는 호소가 질환의 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민간인 학살을 직접 경험한 제 외할머니도 매번 선거 전날이면 (주로 진보정당을 뽑는) 어머니에게 "그 당 빨갱이라 허는디! 뽑으면 못 쓴다 아가" 하며 몇 번씩 전화를 하십니다. 

포성은 1953년에 멎었지만 전쟁을 겪은 생존자들의 마음속은 아직도 한창 전쟁 중입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옳은 명분을 위해 휘두르는 폭력은 폭력에 재미 들려 휘두르는 폭력에 비해 더 올바른 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는 폭력을 이등분해서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내전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이른바 '옳아 보이는' 폭력과 '비이성적인' 폭력이 함께 공존하며 동시에 일어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본 영화를 예시로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영화 <국적 없는 짐승들> 中

국적 없는 짐승들(Beasts of No Nation)은 가상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내전에서 '아구'라는 소년이 어떻게 소년병으로 끌려갔고, 그의 영혼이 전쟁으로 인해 어떻게 망가져 가는지를 그려낸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아구가 소속된 NDF라는 무장단체는 헌법을 뭉개려는 정부에 맞서 민주주의와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일어난 단체입니다 (어찌나 정당한 싸움을 하는지, 영화 중반에는 이 단체가 UN과 서방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들은 전투훈련을 받으며 "전투 중엔 항상 NDF의 사명만을 기억하고 싸워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다른 세력들과 아귀다툼을 벌이는 NDF 부대들은 표면에 나타나는 정당성과는 별개로 극도로 폭력적이며 비도덕적인 집단입니다. 병력의 절대 대다수는 아동과 청소년으로 이뤄진 소년병들입니다. 그들은 마약과 살인에 탐닉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전혀 주저가 없습니다. 심지어 지휘관의 부관이자 부대의 정치장교 역할을 맡은 'TWO-I-C' 마저도 부대 안에서 양심과 원칙을 상징하는 인물임에도 불구, 부대 안에서 벌어지는 살육과 부도덕한 행위를 용인 내지 묵인하는 경우가 자주 연출됩니다.


극 중에서 NDF 병사들은 본인들이 저지르는 살육과 폭력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The National Reformation Council took advantage of this instability and militarily seized power to restore UPC dominance. We NDF refuse to recognise this illegitimate government." (국가회복위원회가 정국의 불안정을 노려 무력을 사용해 UPC 정권을 다시 세워버렸다. 우리  NDF는 이 불법정권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반면에 다른 한 장면에서는 마을을 약탈하며 찾은 한 사람을 폭행하며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You know this woman? I want to rape her!" (너 이 여자 알아? 강간하고 싶단 말이야!)


어떤 게 NDF의 참모습일까요? 굳이 참모습이 뭔지 가릴 필요가 있을까요?




본질적으로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일은 정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이겠습니다만,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런저런 명분을 다 걷어내야 비로소 폭력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폭력은 본질적으로 상대방을 깔아 낮추기 위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를 내 아래에 깔아 넣으면서 나 자신에게 더 큰 권력을 쥐여주고, 그 와 동시에 상대방이 내가 권력을 쥐는데 큰 이견이 없도록 억압하는 효과를 냅니다. 마을을 불태우고, 성관계를 강제하고, 누가 어느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로 구덩이에 파묻는 행위는 모두 "나는 너에게 이런 무서운 짓을 마음껏 저지를 수 있는 힘이 있다; 난 너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칼리바스가 말했듯, 내전과 같이 국가의 통제가 통째로 뽑혀나간 상황에서는 이러한 폭력행위가 몹시 중요하리라 짐작합니다. 아마 여러 무장단체가 난립한 곳에서 정치적 질서를 재수립하고 사람들의 충성심을 얻는 건 보기 좋은 명분뿐만 아니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포일 테니까요. 무조건 이겨야 살아남는 곳에서 명분이니, 도덕이니는 딱히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어쩌면 모두가 미쳐버린 그 상황 속에서도 명분과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더욱 잔혹한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겠지요.


폭력을 통해 한 사람은 통치를 하고, 한 사람은 굴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의에 의해, 또는 타의에 의해 그것을 정의라 부릅니다.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라 하겠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이러한 폭력이 당사자들에게 어떻게 기억되는지, 그리고 기억이 어떤 정치적 힘에 의해 뒤틀리는지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커버 이미지 - <국적 없는 짐승들> 홍보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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