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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박사 Jun 23. 2020

폭력 - 그리고 침묵

정치가 사람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는 과정 -2-

나를 아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지만 누구도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
‘도피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도피자 가족을 안다는 것은 곧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와 함께 빨래를 하던 사람도,
우리 집에 물건을 빌리러 왔던 사람도,
아침에 인사를 나눈 사람도 나를 모른다고만 했다.
-
(김00, 제주 4.3 사건 증언 中)


시작하기 전에: '폭력' 회차는 몹시 잔인하고 마음 아픈 사례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만큼, 읽기 전에 주의를 요합니다 (집단살인 등)



개인사를 한번 꺼내고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제 외할머니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직접 목격한 피해자입니다. 전쟁이 터지자 시집에서 죽기 싫다며 친정으로 돌아간 외할머니는 그때 그 시절을 "'그짝' 사람들이 친정집 뒷산에 동네 사람들 많이들 파 묻었다"라고 짤막히 회상하십니다.


전쟁 후 태어난 제 어머니는 어렸을 적 누가 '그짝'에 붙었고, 누가 누굴 왜 미워했는지 모르고 살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도, 본인의 제일 친한 친구의 집안이 "아마 '그짝'에 붙었었다고 했었던 것 같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그짝' 사람들의 신경을 살살 긁는 행동을 종종 했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논에 물이 덜 들어가도록 도랑을 엄하게 치던지, 아니면 웬만하면 웃고 넘어갈 일에 굳이 트집을 잡으며 크게 다툰다던지.


"촌사람들은 그런  사소한 것들 가지고 얼굴 붉히며 싸웠다"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재미있게도, 제 외가 근처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은 제대로 된 보고가 되지 않아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근접 지역의 다른 사건을 조사하다 우연히 발견해 따로 조사를 한 사건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 마저도 그때 그 시절의 맥락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정부 조사가 있어야 비로소 그 전말이 드러날 정도로 침묵을 지킨 것입니다.


지금은 조용한 시골 동네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 그때 그 시절 폭력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뭐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극단적인 폭력이 일어난 후엔 다시 삶을 시작하기 위해 그 폭력을 수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회 공동체가 그런 폭력을 수습하기 위해 과거에 일어난 폭력을 설명하기보단, 그저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뒤흔드는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모르겠다" 또는 "뭐라 말할 것도 없다"라고 얼버무리는 일은 사실 이해하기 힘듭니다. 정치적 동기가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민간인 학살 증언을 들어봅시다. 이 사람은 진술 당시 동네 이장으로,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기념하는 사업에 매진해 온 분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그는 열몇 살 먹은 청소년이었고, 학살 현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는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건의 가해자가 정확히 누구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지방좌익과 인민군이 서로 혼합되어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가해 장면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해자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후 진술인 봉사하는 마을은 좌, 우를 따지지 않는 이른바 '용서와 화해의 마을'이라는 말을 굳이 덧붙입니다:


"가해자, 피해자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런 것을 토대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우익에 의한 희생사건과 좌익에 의한 희생사건을 함께 다루면서 용서, 화해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앞뒤가 맞질 않습니다. 학살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가해자가 누군지 모르며, 본인은 당사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는 와중에 온 마을이 가해자, 피해자 같은 주제를 스스로 꺼린답니다. 누가 죽였고, 죽임을 당했는지 알아야 말을 고를 테니 아마 모두가 누가 어떤 이유로, 어디에서 누구에게 죽었는지 안다고 봐야겠습니다.


실제로 빨치산 활동을 하다 경찰에게 자수했던 같은 마을 주민의 증언에서는 누가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매우 구체적인 증언이 나옵니다. 그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 바로 마을 사람들이 가해의 주체였다는 점을 짚습니다:


"A는 개인감정으로 죽었다. 유격대 소대장과 결혼하기로 한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A와 결혼을 했고, 임신을 했다. 그러자, 유격 소대장이 A와 그 부인, A의 아버지 B를 죽였다. A의 부인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중략) A는 한 20세 정도였다. A가 죽은 것은 내가 00면에서 내려와 고향에 돌아와 소문을 들어 알게 되었다."


"C는 000 입구 건너편에 있는 야산 길가, 일명 000에서 죽었다. 시신은 모두 수습해서 산소를 썼다. 유격대에게 죽었다. 칼에 찔려 죽었다. C는 남의 논을 샀었는데, 그 논은 원래 소작하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C가 논을 산 후로 소작을 하지 못하게 했고, 그 소작하던 사람이 유격대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유격대가 C를 데려가 죽인 것이다."


마을 이장은 무엇 때문에 침묵을 지키려고 한 것일까요?




다른 지역에서 청취된 진술에서 피해자들의 침묵의 의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습니다. ㅁㅁ마을에 거주했던 이 피해자는 아버지가 국군이 마을 근처에서 작전을 벌인다는 것을 알고 마을회관에 있는 인공기를 떼 냈다고 합니다. 당시 좌익활동을 하던 이웃이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다시 내 걸 새로운 인공기를 몰래 수소문하다가, 그게 아버지를 밀고하는 모양이 돼버려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는 인공 시절 자기 마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썩 좋은 부락이 안돼서 인민위원회나 그런 데에 쏠린 사람들이 60-70%나 되었고... 우리 마을 세 사람을 같은 장소에서 죽였습니다."


진술로 본 그는 가해자가 누구인지, 살해의 결정권자가 누구인지 매우 잘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만, 가해자가 누구인지 묻는 말에는 대답을 거부합니다:


"마을에서 기억나는 좌익들이 있나요?

"모릅니다."

"혹시 가해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런 얘기를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미 그분들은 모두 다 고인이 되셨습니다."


그는 침묵을 통해 더 이상 이웃을 그때 그 시절의 시선으로 보고 싶지 않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더불어, 그의 아버지가 어그러진 진술에 의해 살해를 당했듯, 그의 이웃들이 자기의 진술로 해를 당하면 안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좋지 않은 기억은 차라리 잊어버리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는 듯 보입니다. 그가 전쟁에 가진 미련은 아버지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것 같다는 죄책감 뿐입니다:


"8월이라 부기가 났고 흙과 범벅이 되었기 때문에 외모로는 찾지 못하는 상태였고 직계가족 아니면 알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양말과 의복으로 찾았습니다. 아버지는 바지저고리에 양말을 신고 계셨습니다. (중략)


아버지의 아들 입장이지만 내가 과연 아버지를 모셔다가 매장을 했는지 의문이 들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의복으로 시신 확인을 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자기 가족 시신을 모셨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4.3 사건 당시 경찰과 어린아이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시작은 공산폭동이었다"라고 했을 정도로 철저한 침묵에 부쳐진 사건에 대해 국방부가 사과를 하기까지 71년이 걸렸습니다


강제되는 침묵


반면, 힘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침묵이 강제되기도 합니다. 수십만 명이 학살로 죽은 르완다는, 학살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던 '후투', '투치' 정체성을 언급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과거 사회 공동체가 저지른 극단적인 폭력을 집단 망각으로 넘어가려는 셈입니다. 모두 다 잊어버려야 비로소 서로 화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반면, 어떤 사회는 어느 하나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침묵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경우 제주 4.3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가 영화제에서 상영이 취소되고, 감독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받기도 했었습니다.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사람들이 겪은 아주 먼 옛날의 일인 것 같지만, 지극히 최근까지, 심지어 문민정부가 그들이 과거에 저지른 폭력에 대한 고발을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군부독재 시절 일어난 1965년 좌익 학살에 대해 "좌익의 국가전복 시도를 막기 위해 전국적인 좌익 소탕 작전이 있었다"는 정부의 입장만을 견지하며 정부의 공식 입장에서 벗어난 다른 견해(달리 말하자면, 피해자들의 견해)를 강압적으로 지워버렸습니다. 그때 그 시절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죠슈아 오펜하이머는 인도네시아에 있었던 학살 피해자들이 통 입을 열지 않는 반면, 가해자들이었던 지역 민병대 또는 정치가들이 가해사실에 대해 몹시 자랑스러워하고, 구체적인 진술을 하기 좋아한다는 점을 캐치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가해자들이 '영광스러웠던 그 시절'을 본인들이 직접 영화로 제작하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 피해자의 시선으로 가해자들의 기억을 바라본 <침묵의 시선>을 제작했습니다. 가해자들의 입을 빌려 피해자들을 대신해 그때 그 시절의 폭력을 고발한 셈입니다.



"여보, 람리를 기억해? 끌려간 우리 아들 람리 말이야"


이런 침묵은 폭력에 대한 정당화와 함께 강요됩니다. 많은 가해자들은 자신들의 저지른 폭력에 대해 자랑하길 즐겨하고, 그 행위가 공동체의 안위에 기여했다는 점을 몹시 강조하고 싶어 합니다.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침묵의 시선>의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장면입니다 ㅎ_ㅎ 오펜하이머의 <침묵의 시선> 中.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아디'는 1965년 좌익 학살 당시 형이 친군부 자경단에게 끌려가 강가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검안사로 일하는 아디는 형을 죽인 가해자들에게 안경을 맞춰주겠다는 이유로 찾아가 가해자들에게 왜 사람을 죽였는지 묻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이제 노인이 된 가해자가 자랑스레 자기가 했던 일을 아디 앞에서 늘여놓다가 앞에 앉은 검안사가 학살의 피해자인걸 알자 자리를 떠나려 합니다.


가해자의 딸은 아버지가 공산당을 소탕했던 과거를 자랑스러워했다가 "머리를 잘라 사람들에게 보였다", "미치지 않기 위해 죽인 사람의 피를 마셨다" 등 '영광의 순간'의 실상을 아버지로부터 구체적으로 듣자 몹시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리고 아디에게 "우리 어렸을 적 서로 아는 사이 아니었나?" 묻고 "아버지는 이제 나이가 많아서 뭣도 잘 모른다. 아버지를 용서해달라" 상황을 수습하려고 무던히 노력을 합니다. 가해자의 가족이 불편함과 미안함을 내보이며 사과를 건네지만, 죽은 사람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강요된 침묵은 그 자체로 또 다른 폭력입니다. 제주 4.3 사건 피해자들을 연구한 사람들은 피해자들이 종종 말을 잇지 않으며 먼 산을 바라보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그저 가슴을 치는 등 몸짓으로만 본인들이 보고 느낀 것을 전하려 했다고 기록합니다. 국가가 사람을 보내 감시를 하고, 연좌제로 불이익을 받는 세상에서 강요된 침묵을 지키다, 이제서야 본인들이 보고 느낀 것들을 꺼낼 수 있는 세상이 오자 그 기억을 말로 표현할 방법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침묵의 시선>에서도 나이가 많이 들어버린 피해자의 아버지 또한 아내가 "우리 아들 람리를 기억해?" 물어도 끝까지 죽임 당한 그의 맞아들 람리를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폭력이 피해자의 목숨만 빼앗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억에서도 그를 지워버린 것입니다.






(커버 이미지 -  <침묵의 시선> 홍보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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