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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박사 Jun 18. 2020

북한은 왜 호랑이 등에 올라탔나

북한은 왜 항상 이러죠? 개인과 집단의 믿음이 정치에 끼치는 영향 -2-


몇 년 전 국제기구에서 일하던 시절, 어느 국제무대에서 북한 외교관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한참 영어로 업무 연관된 잡담을 나누다 제가 함경도를 고향으로 여기는 한인인걸 알아챈 그는 "거 동포끼리, 우리 조선말로 합시다" 하며 씩 웃어 보였습니다.


정확한 대화 내용은 깊이 언급할 내용이 아닌 듯합니다만, 그는 "항상 잘 되려다가 외교적으로 얼어붙어서 진도가 안 나간다"는 말을 하며 지속되는 남북, 그리고 나아가 국제사회와 북한 간 긴장국면을 못내 아쉬워했답니다. 제가 진행하던 한국 주도 국제협력 사업에 대해서도 굉장한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우리도 이 사업에 기여할 바가 참 많아 보인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함께 하면 좋겠다"며 뿌듯해 한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짧다면 짧은 접촉이었지만 그쪽 공직자들도 미래를 내다보려는 노력과 전략적인 사고를 하고, 우리만큼이나 소속된 공동체에 깊은 애착을 느끼는 사람들임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북한 노동신문이 공개한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장면 (노동신문)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노래하듯, 북한은 "결심하면 하는, 한다면 하는"는 그런 곳입니다(...) 저렇게 하나하나 떼 놓고 보면 점잖은 사람들이 세상에 뭘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지, 선전매체를 통해 쏟아내는 언사와 행동을 보면 아주 화끈하기 그지없습니다. 2020년 6월 16일 북한은 한국 정부의 대화 제안을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응수했습니다. 남북이 인내하며 쌓은 지난 3년간의 성과를 단숨에 무너뜨리려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북한은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고, 뭘 얻으려고 하는 걸까요? 전편에 언급했듯, 합리와 불합리는 개인과 집단이 가진 문화적 특성, 경험, 그리고 감정 등 주관적인 사고 속에서 정해집니다. 즉, 북한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북한의 입장과 경험에 빗대 상황을 바라봐야 합니다.


북한은 뭐 때문에 뿔이 나 있나


여러 전문가들이 이미 지적했듯, 북한은 순전히 삐라 문제만 가지고 격정을 낸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삐라 살포는 수십 년간 진행된 연례행사에 가까운 데다, 그 내용물도 체제를 위협한다고 보기엔 좀 조악한 콘텐츠인 게 사실입니다. 오히려 몇 년 전 한국 정부가 추진한 지상파 방송 송출용 스크린 설치가 북한 체제에 더 큰 위협이었을 겁니다. 김정은 본인도 "밖에서는 나를 로켓트맨이라 부른다던데..." 하며 대외에서 본인을 보는 조롱조의 눈빛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인 바 있지요.


북한의 대남 발언을 살펴본다면 삐라 문제는 뒷전이고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것과는 다르게 대북경협 사업 추진이 지지부진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짚고 넘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6월 17일 자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1부부장의 담화문 일부를 그대로 노동신문에서 긁어 가져와 봤습니다:



"력사적인 판문점선언과 평양공동선언에 서명하였을뿐아니라 8천만 겨레앞에 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공언한 당사자로서 북남관계가 잘되든 못되든 그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는 자세와 립장에 서는것은 너무도 응당한것이다. 그런데 이번 연설을 뜯어보면 북남관계가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있는것이 죄다 그 무슨 외적요인에 있는듯이 밀어버리고있다. (중략)


연설대로라면 북남관계가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한것이 남조선내부의 사정때문이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지지가 따라서지 못했기때문이라는것인데 과거 그토록 입에 자주 올리던 《운전자론》이 무색해지는 변명이 아닐수 없다. 《기대만큼 남북관계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은것에 대해 나 또한 아쉬움이 크다.》고 하였는데 막연한 기대와 아쉬움이나 토로하는것이 소위 《국가원수》가 취할 자세와 립장인가."



어떤 게 못마땅한지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여정의 담화문에서 삐라살포를 문제 삼을 때도 지난 몇 년간 한국이 남북 간 합의사항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북한이 진짜 삐진 이유가 뭔지 확실해지는 것 같지요?


북한은 지금껏 한국과 소통할 때 동일한 민족 공동체임을 자주 어필하는 편입니다. 북한의 제일 유명한 대남선전매체의 이름도 <우리 민족끼리> 일 정도로 남북의 특별한 관계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편입니다. 남북 간에 설명할 수 없는 끈끈한 관계에 큰 비중을 두는 북한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이 미국과 긴밀한 공조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 협상에 나서는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몹시나 당연한) 모습은 북한의 전략적인 이득은 차치하고, 인간적인 섭섭함을 느낄 만도 합니다. 특히나 북한은 지난 몇 년간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며 변화에 큰 의지를 보인 바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지지부진함과 미국의 부동을 더욱 그렇게 느낄 겁니다.




여기에 더해 북한은 코로나 19 창궐로 인해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미비한 의료 인프라 때문에 중국과 교류를 한동안 봉쇄했던 북한은 굉장한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한 일본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향후 2-3년 치의 외화밖에 남지 않았았다고 합니다. 북한은 코로나 19발 경제 한파로 인해 올해 -6% 성장을 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7년에 버금가는 큰 경제적 충격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남북경협에 더 큰 노력을 가할 만한데, 오히려 한국의 경협 제안을 걷어차며 똥볼을 차고 있습니다. 돈이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었는데 왜 어떤 연유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우리는 북한에 정보통이 없어 북한 당국이 정확히 어떤 판단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보았을 때, 오히려 북한이 내부적으로 단결하기 위해 허수아비를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정은 정권은 경제적인 성과와 인민들의 삶의 질 개선에서 발전이 있었다는 메시지로 본인의 집권을 정당화하고 있거든요. 단례로 최근 들어 버섯처럼 솟아나기 시작한 북한 선전용 유튜브 채널들도 평양의 삶과 대형 마트에서 장보기, 여가생활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북한 주민들의 더 나아진 삶의 질을 지속적으로 어필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 것은 김정은 체제에 큰 부담이 되었고,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릴 다급한 이유가 있지 않았나 추측이 가능합니다.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는 그곳엔 와이파이가 없는 대신 휴지는 참 많습니다. (유튜브 선전물  스크린샷)


북한은 뭐 때문에 말로 안 하고 그렇게 행동하나


저 두 이유를 합쳐 보면, 북한은 대외적 관심이 극도로 필요한 상황입니다. 코로나 19 발 경제위기 때문에 워낙 죽을 맛인 와중에 유엔의 대북제재도 풀어야 하고,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한국과의 남북경협도 북한의 생존을 위해 꼭 풀어야 하는 숙제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북한 입장에서는 생존과 번영이 걸린 매우 위중한 과제인 와중에, 북한 외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주 깜빡하며 뒷전으로 미루는 일이기도 합니다. 당장 북한 바로 옆동네에 사는 우리들만 해도 출퇴근하면서 북한 생각 얼마나 합니까...?


대외의 관심이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북한은 가진 게 별로 없어 한국이나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 볼 거리가 별로 없습니다. 이해관계에 놓인 당사자들이 북한을 봐줘야 일이 진행이 되는데 이런저런 일이 너무 많아 북한을 볼 여유가 영 생기지가 않습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나 안 봐주면 내래 상을 뒤집어 버리갓어!"식의 북한의 모든 걸 건 "값비싼 신호"를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선 어떤 신호가 가장 값이 많이 나가면서도 제일 적절한 신호를 보낼 수 있을까요? 딱히 선택지가 없습니다. 결국 북한이 가진 값비싼 신호들 중, 제일 큰 관심을 끌 수 있는 건 바로 남북 화해무드에 쇠말뚝을 박아버리는 짓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총선에서 압승을 한 문재인 정권이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매몰차게 뿌리쳐버리는 북한의 가오! 얼마나 황당무게하면서도 짜르르 삘 받는 그림입니까. 한국에 메시지를 보냄은 물론, 대외에 적을 만들어 내부의 무질서를 규합하는 효과도 냅니다.


특히나 핵실험이라던지, 탄도 미사일 실험 등 미국을 겨냥한 신호와는 달리, 한국을 향한 신호는 남북 간 오래된 전통(?)을 따라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리스크도 덜하다고 봤을 겁니다. 북한은 대체적으로 긴장국면 조성 후 그 상황을 수습하자는 명분으로 대화를 제안하는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북한은 2011년 연평도에 포격을 한 이후에도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대화를 하자고 제안하는가 하면, 2015년 군사분계선에 대북 확성기를 향해 포격한 이후에도 곧바로 대화를 할 용의가 있다는 의사를 보내왔습니다. 한국 정부는 대체적으로 이런 패턴을 이해하며 북한의 요구에 응해왔습니다. 


고로, 북한은 아마 그들이 어떤 행패를 부리더라도 한국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 관리를 위해 너무 큰 반발을 하지 않을 것이다는 믿음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요. 그리고 그 행동을 시작으로 한국과 진지한 대화를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특히나 상대는 김정은과 정상회담을 수차례 하고 평화와 대화를 강조하는 문재인입니다. 에이 뭐, 잘못될 일 있을까요? 예전부터 계속해 온 일인데, 한국도 잘 이해해주겠지요?


"북... 한... 과의 관계 관리를 위... 해... 너무 큰 반발... 않을 것..." 김정은의 도박은 성공했을까요?  


북한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국


근데 세상 모든 일이 다 사람 뜻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일이 잘 안 풀려버립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한국 정부는 북한이 벌인 일련의 과격행동에 대해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강경한 입장을 내 보이고 있습니다. 청와대 대변인이 김여정 발 담화문에 대해 "북한은 앞으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라"라고 말하지 않으면, 국방부는 북한이 무력도발을 "실제 행동에 옮길 경우 북측은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발언을 했습니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오히려 북한이 무력도발을 해 오기를 벼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6.15 선언 20주년을 맞아 낸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사 또한  "한반도는 아직은 남과 북의 의지만으로 마음껏 달려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더디더라도 국제사회의 동의를 얻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라 전하며 북한에게 일은 북한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으며,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라는 점을 굳이 짚고 넘어갔습니다. 한국의 본래 입장에서 한치도 움직이지 않은 와중에 이에 더해 북한에게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싶으면 기본을 지키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한국도 북한의 과격행동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이 이보다 더 심한 행동을 하면 무력 투사도 불사하겠다는 값비싼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서로가 남북관계를 볼모로 건 벼랑 끝 전술을 벌이는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문재인 정부가 이제야 한국 내 정치 속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슬슬 팔 걷어붙이고 남북 간 선언을 한국 독자적으로라도 이행하려는 참에 나온 북한의 강짜는 몹시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대화를 위해 무력도발을 시도하는 북한의 습성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북한


호랑이 등에 타고 달리기 시작하면 도저히 중간에 내릴 수가 없습니다. 호랑이 등에 타고 있자니 힘들고 무서워 죽을 판인데, 그렇다고 호랑이 등에서 뛰어내리자니 호랑이한테 물려 죽을 판입니다. 북한이 가진 회심의 값비싼 신호를 한국이 잘 받아줄 거라는 믿음과는 달리 한국이 더욱 강경한 어조로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 인사들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북한은 현실과 괴리된 상황판단으로 일을 그르쳐 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든 믿었던(?) 한국이 판을 엎어버리자 북한 입장에서는 죽을 맛일 겁니다. 이제 북한에게 남은 카드는 딱 두 가지 방법이거든요. 이쯤 하고 물러서거나, 아니면 위기감을 한껏 더 끌어올려서 한국 정부의 양보를 받아내려고 시도하거나. 그런데 여기서 물러서자니 공식채널을 통해 쌍욕을 퍼부은 지도부의 위신이 서질 않고, 그 사람 좋아 보인 문재인 정부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는 걸 보니 한대 더 치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습니다. 원래 착한 친구가 화내면 더 무섭습니다 연락사무소 폭파시킬 땐 신났겠지만, 파티가 끝나고 보니 알맞은 출구전략이 보이질 않습니다. 호랑이 등에 올라 탈 때까진 좋았는데, 호랑이가 달리기 시작하니 도저히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더 이상 공개되는 정보가 없는 관계로 이 상황이 향후 어떻게 변할지 전망하는 것은 선녀님, 동자님들 소관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력충돌을 앞에 두고 이런 값비싼 신호가 오고 가는 상황은 극도로 위험천만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북한이 무력도발을 시도한다면 한국 정부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까요? 한국의 강경한 메시지에 북한은 어떤 대응을 고심하고 있을까요? 서로의 주관에 사로잡혀 결정을 하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이런 값비싼 신호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투명하게 밝혀서 무력충돌 없이 서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합리와 불합리는 각 개인과 집단의 주관에 달려있는 만큼,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남북 당사자들의 지혜와 소통, 그리고 인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봐야겠습니다. 사실 제 생각으론 북한의 현실적인 판단이 더 중요해 보이긴 합니다만...




처음에 언급한 그 북한 외교관과 헤어질 때가 되자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마 내 세대는 그 날을 보지 못하겠지만... 아마 앞길이 창창한 그쪽 선생님 세대에는 우리가 하나가 되는 날을 볼 수 있겠지요?" 


"아니요, 빠른 시간 내에 그렇게 되겠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출장을 와 있는 동안이라도 서로 가끔 보고 인사하자는 약속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다 지나고 그 분과 잘 지내셨느냐, 바쁜 와중에 식사는 하셨느냐 물으며 다시 악수를 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강물이 바다를 포기하지 않듯, 우리도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오겠죠? 일단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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