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합리적이고, 진실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대부분 불확실에 가득 찬 파편적인 정보에 의존해 해석한 정보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세상, 그리고 우리가 합리적이다고 생각하는 것은 감정(Mercer 2010), 문화적 맥락(Ostrom 1990), 그리고 학습된 경험(Axelrod 1984)에 의해 현실로 여겨집니다.
A와 B가 있다고 칩시다. A에게 100달러를 주고, B에게 이 돈을 어떻게 분할할지 제안을 하게 해 봅시다. 만약 B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A와 B 모두 A가 제안한 비율로 돈을 나눠갖습니다. 만약 B가 제안을 거절하면 A와 B 모두 돈을 갖지 못합니다.
A와 B가 모두 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이성적인 사람일 경우, A는 B에게 1달러를 준다고 제안하고, B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비록 A가 훨씬 더 많은 액수를 얻지만, B 또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보단 1달러를 얻는 게 훨씬 더 이득이거든요.
하지만 실제로 이 문제를 두고 실험을 한 결과 A와 B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여겨지는 위와 같은 선택을 하지 못했습니다. 실험이 이뤄진 문화권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났지만, 보통 A와 B는 절반 즈음을 나눠갖는 선에서 돈을 나누기로 합의를 했다고 합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그게 공평하기 때문에"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실험에 임하며 A는 공평한 제안을 하지 않으면 B가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B는 공평하지 않은 제안은 거절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공평함'에 대한 믿음이 A와 B가 어쩌면 비합리적인 딜을 하게끔 서로의 사고방식을 바꾼 것입니다.
위 실험에서도 볼 수 있듯, 서로 다른 감정, 문화적 맥락, 그리고 다른 경험을 가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사고방식 아래 다른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몹시 높습니다.
전쟁은 합리적인 결정일까, 믿음의 결과일까?
믿음으로 인해 합리와 불합리의 경계가 흐려지는 일은 정치에서 몹시 흔하게 일어납니다. 한번 전쟁을 예로 들어 정치 속 믿음의 역할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클라우제비츠 가라사대,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라고 했으니, 이래도 아마 괜찮을 겁니다.
전쟁은 낭비성이 짙은 정치활동입니다. 사람이 무수히 죽고, 경제활동이 멈추며, 그 사회가 이룩해놓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전쟁은 정말 백해무익한 하느니 못한 짓입니다. 제임스 피어론(Fearon 1995)은 백해무익한 전쟁보다 차라리 양 세력이 협상을 해서 공평하게 나눠 가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일어납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를 아래의 이유에서 찾았습니다.
1) 정보의 불일치 (Information Asymmetry)
우리는 상대가 가진 패를 모두 볼 수 없습니다. 왠만하면 우리가 가진 패를 상대에게 모두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을겁니다. 우리는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지도 하지만, 북녘 공화국 그분들처럼 큰소리를 뻥뻥 쳐 가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협상판에 노이즈를 잔뜩 일으키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치는 뻥카를 상대가 믿게 하려면 그 허풍이 진짜인 듯 보일 수 있도록 상대가 믿을만한 허풍을 쳐야 합니다. 이걸 정치학에서는 "값비싼 신호(Costly Signal)"라 부릅니다. 목숨을 걸고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한다던지, 뜬금없이 포격을 한다던지.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었을 때 맥주병을 깨는 정신 나간 사람들의 심리라 하겠습니다. "나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한 번 쳐 보라우!" 하는 행동이죠.
이런 신호는 실제 전쟁을 일으키려는 의도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의도치 않은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2011년 연평도 포격 도발의 경우도 대한민국 정부가 광범위한 보복대응을 하며 확전을 하려고 하자 미국이 한국 정부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고 하지요.
"값비싼 신호"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하긴 했지만, 망나니들 하는 꼴이 어찌나 다들 그렇게 비슷한지(...)
2) 서로 믿지 못하기 때문 (Credible Commitment Problem)
만약 합의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양 세력은 서로가 그 합의안을 정말 지킬지 믿지 못합니다. 힘이 더 센 세력의 경우 상대방의 힘이 커져 더욱 나은 합의안을 요구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힘이 약한 세력은 나중에 힘이 센 세력이 본인들의 주장을 힘으로 찍어 누르려 하지 않을까 의심합니다. 의심을 거둘 수 있는 판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전자의 경우 분쟁의 씨앗을 떡잎부터 자르기 위해, 후자는 더 늦기 전에 협상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도록 실력행사에 나서게 됩니다. 정치학에서는 이걸 '약속 이행의 문제 (Credible Commitment Problem)'라 부릅니다.
피어론은 이걸 합리적인 선택 이론으로 풀었습니다만, 결국 양자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상황을 해석하는 믿음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겠습니다. 합리적인 결과가 도출됐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서로의 행동을 전쟁행위로 보는지, 협상의 일환으로 보는지에 대한 상황 해석이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결정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특히나 정보가 부족하고,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는 우리가 판세를 어떻게 해석하는 방향이 결정의 합리와 불합리를 가르게 됩니다. 두 개의 예시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보 딜레마, 그리고 믿음으로 인해 붕괴된 유고슬라비아
로버트 저비스(Jervis 1978)는 핵으로 발끝까지 무장한 지구에 과연 평화는 오는가를 물으며 평화와 안정의 조건을 게임이론적으로 풀었습니다. 장황한 저비스의 논리는 잊혔습니다만 (워낙 장황한지라 솔직히 저도 몇 주 전에 외우다시피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억에 없습니다;), 그의 논리적 사고의 결과는 국제정치학 불멸의 이론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는 1) 공격자가 수비자보다 더 전쟁에 쉽게 이기는 세상, 2) 공격적 무기와 수비용 무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의도를 믿지 못해 모두가 상대방보다 더 많은 무기를 비축하려 하는 군비경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른바,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이론입니다.
이런 세상이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대로 현실화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소총, 기관총 등 소화기가 나라 곳곳에 위치한 무기고에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 민족들의 민병대들이 근처에서 찾기 쉬운 소화기로 무장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여러 민족이 한데 어우러져 살았던 과거로 덕분에 각 민족이 서로 뭉쳐서 살지 않고 크고 작은 고립된 군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991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민족 구성 지도. 각 민족을 상징하는 청색, 녹색, 황색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습니다.
소총, 기관총 따위로 무장했으니 공격용 무기와 수비용 무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 크고 작은 고립된 군집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먼저 공격해 흩어진 군집을 먼저 큰 영토로 합치는 세력이 절대적으로 유리해지는 판이 만들어졌습니다. 배리 포젠(Posen 1993)에 따르면 이런 상황이 민족 간 갈등이 첨예해진 유고슬라비아를 민족 간 내전으로 밀어 넣었다고 합니다.
포젠은 서로가 공격을 위해 무기고를 터는지, 방어를 위해 무기고를 터는지 모르는 와중에 먼저 치는 놈이 이길게 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각 민족 세력이 에라 모르겠다, 서로 선빵을 치고 나왔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보스니아 내전의 경우 어느 세력이 먼저 적대행위를 했느냐가 아직도 불확실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의도를 믿지 못하고, 분명 선빵을 치는 놈이 이길 거라고 믿는 현실이 처절한 내전으로 이어진 것이죠.
한때 인구의 상당수가 자기 민족이 아닌 '유고슬라비아인'이라 불리길 원했던 나라는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사라예보의 "저격수 골목"을 뛰어 넘어가는 주민.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저격수가 지키는 이 골목을 목숨 걸고 뛰어가야 했습니다 (AP Photo/Michael Stravato)
보스니아군 소속 저격수 "애로우." 세르비아인인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엔 언론학을 공부하던 여대생이었답니다. (AP Photo/Martin Nangle)
현실에서 벗어난 믿음이 참패를 부른 이스라엘의 4차 중동전쟁
1967년 6일 전쟁을 압도적인 공군 전력을 사용해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침공 징후를 어떻게 파악할지 고심 중이었습니다.
6일 전쟁은 이집트의 군사행동을 전쟁 징후로 이해했던 이스라엘이 선제 타격을 가해 대승을 했지만, 당시 이스라엘 내에서는 이집트가 과연 전쟁을 원했는지, 협상을 통해 긴장해소를 할 순 없었는지 회의적인 시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고로 이스라엘은 전쟁 징후를 정확히 파악해, 이집트의 전쟁 의도가 없는 값비싼 신호와 정말 전쟁을 하기 전에 나타나는 전쟁 징후를 분간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호전적 행동이 국제사회에서 큰 지탄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면이 있습니다. 어찌나 이스라엘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이었는지, 4차 중동전쟁 당시도 이스라엘의 우방인 미국은 올 것이 왔다며 이스라엘을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보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상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스라엘 정보 당국은 이집트에서 활동하는 정보원들을 이용해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공군 전력을 몹시 의식한다는 점을 포착했습니다. 6일 전쟁 동안 이스라엘 공군이 보여준 활약은 이집트 장교들 사이에서 중요한 전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정보와, 이집트 군 내부에서 "이스라엘 공군을 무력화시킬 방법이 없다면 승리를 할 수 없다"는 논의가 있었다는 정보를 접수한 것입니다.
워낙 파편적인 정보를 해석하다 보니 이스라엘 당국이 가진 믿음이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당국이 본 이스라엘 공군은 일단 아랍 국가가 쉬이 견줄 수 없는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강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공군과 이집트 공군의 격차를 보아, 이집트가 단기간 내에 이스라엘에 맞먹는 공군 전력을 보유할 일은 없을 것이라 봤습니다. 그리고 이집트가 종종 군을 전방에 배치했다가 공격 없이 물러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집트 군의 전방 배치만으로는 전쟁 징후로 볼 수 없다는 결론에 큰 무게를 두게 되었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견줄 공군력을 갖추기 전에 군을 전방 배치하는 것은 전쟁 징후가 아닌 그저 정치적인 도발행위일 뿐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 군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소련제 대공 미사일과 대전차 미사일을 대량 구매해 운용하고,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에 쌓은 "바레브 선"이라 불린 방어선을 극복하기 위한 이집트 군의 치밀한 준비작업은 이스라엘 당국이 가진 이스라엘 공군의 위력과 이집트 군이 일정한 전략적 사고를 따를 것이라는 믿음으로 무시된 것입니다.
바레브 선 돌파 구역에 이집트 군기를 걸고 환호하는 이집트 군인들
이 믿음으로 인해 1973년 가을,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 침공을 위해 군을 전방 배치하는 움직임이 포착되자 이스라엘의 결정권자들은 이집트의 의도가 뭔지 지지부진한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새로운 근거가 나와도 항상 "이집트의 공군 전력은 아직 충분히 위협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묵살되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 군이 공세를 시작하는 당일 새벽까지도 공군력이 확보되지 않은 이집트의 군사행동이 과연 전쟁의 징후인지, 아니면 그저 값비싼 신호인지 판단하지 못해 예비군을 소집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군 작전 개시 몇 시간 전이 돼서야 예비군을 소집하고 기갑부대를 전방 배치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급박한 와중에도 국경을 수비하는 이스라엘 군의 현장 지휘관들은 "이집트 군의 공세를 시나이 반도 안으로 더 끌어내 격멸할 수 있도록 기갑부대를 전방에 너무 가까이 배치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군의 역량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이집트 군의 대전차 역량을 무시하는 지시를 내린 것입니다.
그 결과 이집트 군은 개전 9시간 만에 매우 적은 희생을 치르며 바레브 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스라엘 기갑 부대가 방어선을 뚫은 이집트 군을 상대로 반격에 나섰으나, 이집트 군이 반격에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후에야 본격적인 반격이 이뤄졌습니다. 그 덕분에 시나이 방면의 이스라엘 군은 대공 미사일과 대전차 미사일로 머리 끝까지 무장한 이집트 군에 의해 개전 초반 기갑 전력의 60%, 공군 전력의 10%가 격파당하는 초전박살을 맛봤습니다.
그 외 이스라엘 군이 4차 중동전쟁 초반에 당한 대패의 과정은 이미 밑천이 드러났기도 하고 많은 곳에서 다뤄지는 이야기기 때문에 굳이 자세히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 군의 대패의 원인은 군 결정권자들의 현실과 괴리된 믿음이 초동대처 미흡으로 이어져 벌어진 일이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군은: 1)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 공군과 동등한 공군 전력 없이는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2) 이집트 군은 전쟁 의도 없이 전방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초동대응에 실패하고 참패를 겪어야 했습니다.
인생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재니스 스타인(Stein 1985)은 4차 중동전쟁을 분석하며 "믿음을 버리고 불확실함을 포용하는 그 순간에 제일 합리적인 결정이 나온다"라고결론지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상대가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에 우리 결정을 맡기지 말고, 계속 질문하고, 계속 의심하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 게 좋다고 본 것입니다.
어쩌면 참 당연한 소리를 늘여놓은 것 같지요? ㅎ_ㅎ 재미있게도 믿음이 개인의 결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는 정치학계 내에서 이견이 분분한 주제입니다. 실체가 우리의 사고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실증주의 (Positivism) 편에 선 양반들은 믿음의 영역을 굉장히 작게 보는 반면, 우리가 실체라 여기는 것은 그것을 보고 해석하는 우리 생각에 달려 있다고 믿는 해석주의(Interpretivism) 양반들은 믿음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믿음이 정치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2020년 6월, 북한이 내뱉는 적대적 언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고, 한국 정부는 이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요? 다음 회차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