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본질은 제한된 자원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와 그 행위를 합리화하는 논리입니다. 자원의 분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 또는 집단을 우리는 흔히 "힘(Power)," 또는 권력을 가졌다고 표현하곤 하지요?
우리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힘이니, 권력이니, 말하며 지켜보는 것만큼 정치학에서도 힘이라는 개념을 몹시 중요하게 생각한답니다. 어찌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보면 힘에 대한 탐구가 바로 정치학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고로, 오늘은 정치학의 시각으로 본 힘에 대해 한번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원을 마음대로 분배할 권리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정치학에서 보는 힘은 아주 크고 간단히 보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답니다.
자원을 마음대로 분배할 권리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몬티 파이썬과 성배 中>
타인에게 투사할 수 있는 물리적인 힘
힘을 이야기하는데 투키디데스를 빼먹을 수가 없습니다. 투키디데스는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 벌어진 수십 년 간의 전쟁을 기록해 후세대에게 정의와 힘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래 나오는 내용은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중 일부입니다.
멜로스는 스파르타의 식민 시이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는 나라였습니다. 중립이지만 가재는 게 편이라고 사실 스파르타 편을 은근슬쩍 들었다고도 합니다. 한참 전에 아테네가 한번 멜로스를 손 봐주려고 원정에 나섰다가 소득 없이 돌아온 적도 있었죠. 그런 멜로스가 괘씸했던 아테네는 기어이 멜로스를 굴복시키기 위해 대군을 꾸려 멜로스 섬으로 2차 원정을 나갑니다. 아테네와 아테네의 동맹군이 멜로스 섬에 상륙해 멜로스를 에워싸고, 아테네 사절과 멜로스 대표단이 나와 유혈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텐트를 치고 평화협상을 시도합니다. 이른바 "멜로스의 대화"입니다.
그 자리에서 아테네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아테네가 과거에 페르시아인들을 물리쳤기 때문에 제국의 자격이 있니, 과거에 당신들이 우리에게 해를 끼친 것을 기억해 이곳에 왔니- 따위의 말은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쓸데없는 말이니까요. 대신, 당신들도 당신들이 스파르타의 식민 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서 스파르타의 편에 서지 않았니, 우리에게 해를 가한 적이 없었니- 따위의 실없는 말을 하지 말아 주길 바랍니다. 그런 말로 우리를 납득시킬 것이란 기대 또한 버리길 바랍니다.
대신, 우리는 당신들에게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그 사실을 쫓아, 당신들이 지킬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지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이 자리에 선 우리 둘 다 현실 세계에서의 정의는 힘의 균형으로 이뤄지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강한 자는 그가 원하는 대로 가지게 되는 것이고, 약한 자는 그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용납해야 합니다."
아테네 사람들, 말하는 뽄새가 아주 아름답지요? ㅎ_ㅎ 이른바 힘의 논리입니다. 아테네인의 말에 따르면 칼을 쥔 자는 그것을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는 것이며, 칼을 쥐지 못한 자는 마땅히 칼 아래 엎드려야 합니다. 아테네인들은 멜로스 섬을 포위한 채 멜로스인들에게 말합니다: 칼을 쥔 자를 맨손으로 대적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과도 같은 일이라고.
힘의 논리를 주장한 아테네는 정의와 원칙에 어필하는 멜로스인들을 비웃으며 멜로스에 파상공세를 가했습니다. 멜로스인들이 오리라 믿었던 스파르타의 구원군은 오지 않았습니다. 멜로스가 내부의 배반으로 무너지자, 아테네 인들은 본인들이 주장한 힘의 논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창을 들 수 있는 멜로스인 남자를 모두 죽이고, 남은 여자와 아이들은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고 합니다.
2018년 Black Lives Matter 시위자를 구속하는 미 경찰. 약한 자들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용납해야만 할까요? (Reuters via the Economist)
2500년 전 아테네 인들이 멜로스 섬에서 보인 이 안하무인함, 그리고 고립된 멜로스의 무기력함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광경입니다. 나라 간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쉽게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말엔 무게가 없으며, 말에 무게를 싣는 건 결국 누가 더 많은 무기와 돈을 들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그 자원을 더 맛깔나게 쓸 수 있는지가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보스니아 내전을 오랫동안 연구한 포티니 크리스티아(Fotini Christia 2012)는 내전 중 일어나는 군벌들 간 수많은 이합집산의 원인은 이념도, 민족도, 오래된 혈연관계도 아닌, 바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삼국지에서 파죽지세의 기세였던 촉나라에 대적하기 위해 옛 적이었던 위나라와 오나라가 연합하고, 그 후 도저히 뒤집을 수 없는 세력을 구축한 위나라에 대적하기 위해 촉나라와 오나라가 연합한 것처럼, 서로 죽일 듯 싸우던 어제의 적들이 오늘의 전우가 되는 것은 그저 새로이 떠오른 강자에 대적하기 위한 합종연횡이라는 점을 짚었습니다. 크리스티아는 본인이 수년간 쌓은 연구결과를 토대로 이념이니, 민족이니 등 군벌들이 새로운 동맹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내뱉은 말들은 "그저, 말일 뿐이었다(talk was just that - talk)"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꿰뚫는 진리라고 생각한 이 힘의 논리는 나중에 케네스 왈츠 (Kenneth Waltz), 존 미어샤이머 (John Mearsheimer) 등 국제정치학자들이 적극 차용해 "정치현실주의론 (Realism)"이란 국제관계학의 거대한 담론을 구성하기도 했습니다.
행동과 생각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규정하는 힘
한편, (저를 포함해) 칼을 쥔 자만이 힘을 가진다는 것은 어쩌면 빙산의 일각만을 볼 뿐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혹시 미드 왕좌의 게임 재미있게 보셨나요? 저는 왕좌의 게임을 시즌 3까지 보다 말았습니다만, 지금까지 본 부분 중에서 특히 이 장면을 좋아합니다:
바리스: "왕, 사제, 그리고 갑부가 한 방에 함께 앉아 있습니다. 모두 굉장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죠. 그들 가운데에 칼잡이 용병이 서있습니다. 권세를 가진 세 사람 모두 칼잡이에게 본인 외 다른 둘을 죽이라 명령합니다. 누가 죽고, 누가 살겠습니까?"
티리온: "그야 칼잡이 마음대로겠지."
바리스: "그런가요? 그는 왕관을 쓴 것도, 황금을 가진 것도 아니며, 신의 가호를 받은 자도 아닌걸요."
티리온: "칼을 쥐고 있잖습니까. 삶과 죽음을 가르는 힘 말입니다."
바리스: "만약 칼잡이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라면, 왜 우리는 왕이 모든 힘을 가지고 있는 척 행동할까요? 네드 스타크 모가지가 잘렸을 때, 그 목을 친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죠프리 왕? 사형을 집행한 망나니? 아니면 다른 무언가?"
티리온: "... 저는 이제부터 수수께끼를 안 좋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바리스: "힘이란 것은 사람들이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곳에 자리합니다. 그저 속임수일 뿐이죠. 마치 벽에 드리운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바리스와 티리온의 대화, 왕좌의 게임 中)
바리스의 말에 따르면 힘이란 것은 사람들이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곳에 자리한다고 합니다. 그럼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힘이 어느 특정 위치, 또는 사람에게 자리한다고 믿게 되는 걸까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안토니오 그램시는 생전에 한 사회를 얻으려면 그 사회를 사고관을 지배하는 이른바 '헤게모니'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를 규정하는 힘이야말로 바로 사회의 사고관을 움직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는 그 사회의 지식층(이른바 '인텔리겐치아')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다시 규정해 사회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죠.
앉는 자리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라고 흔히 말하지요? 가능성과 불가능을 규정하는 힘은 바로 풍경을 달리 볼 수 있도록 앉는 자리를 옮기는 힘입니다. 미국에 흑백 분리가 시퍼렇게 살아있던 1955년, 앨라배마 몽고메리에 살던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버스 안에서 흑인 전용 좌석으로 자리를 옮기기를 거부해 구속되었습니다. 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비워주지 않았느냐고 묻는 경찰관에게 로자 파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요? 왜 당신들은 우리를 이런 식으로 취급합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버스 안 흑백 분리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로자 파크스와 몽고메리시 흑인 공동체는 버스 이용을 보이콧하는 집단행동을 개시했습니다. 흑인 민권 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앉은자리를 바꾸길 거부한 한 사람의 강단이 흑인들이 풍경을 달리 볼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로자 파크스의 뚝심이 기폭제가 되어 흑인들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집단행동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연 것입니다.
흑인용, 백인용 음수대를 따로 두었던 미국. 작은 용기가 큰 파도가 되어 이런 짓을 정의롭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도록 세계를 이끌고 있습니다.
정치학자 록산 도티(Roxanne Lynn Doty 1996) 또한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 논리를 연구해, "백인 다움"은 백인들이 착취하고자 했던 유색인종의 성질을 규정하면서 만들어낸 상호 주관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합니다. 도티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서구 지식인들은 유색인종의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이 "게으르고 비위생적이고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미개한 족속"들이라 주장했고, 백인들은 유색인종들과 반대되는 "특유의 근면성과 더욱 진보한 지식으로 앞선 문명을 건설한 훌륭한 족속"들이라고 규정했답니다.
백인들은 "백인 다움"과 "유색인종 다움"을 규정한 후에야 비로소 유색인종들을 "선도"하고 "보살피는" 행동을 몹시 정당한 백인의 의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합니다. 사고방식의 변화를 통해 다른 인간에게 차마 저지를 수 없는 억압과 착취를* "가능성의 범위(menu of possibilities)" 안에 있는 행위로 여기게 됐다는 거지요.
*반대로, 제가 억압과 착취를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차마 저지를 수 없는 일이라 여기는 것 또한 시대가 지나며 켜켜이 쌓인 사고관의 변화로 인해 인간의 억압과 착취를 가능성의 범위 밖으로 밀어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도티의 주장에 따르면 사고관은 한때 머무를 뿐, 영구적인 게 아니랍니다. 인권, 민주주의 등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어느 한순간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는 매우 불완전한 것이며, 지속적인 유지보수가 필요한 것임을 도티는 시사합니다.
전소된 로힝야 마을을 순찰하는 미얀마 경찰. 그들은 불을 쥐고 있어서 불을 질렀을까요, 아니면 로힝야 마을엔 불을 질러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을 지른 걸까요? (AP)
짐작하시겠지만, 투사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과 불가능을 규정하는 힘은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실 생활에서는 이 두 개의 힘이 함께 움직이는 경우가 많고, 권력을 쥔 사람들은 이 두 개의 힘을 함께 쥐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이사금들은 그들이 쥔 무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늘을 섬기는 무당 노릇을 하며 본인들의 사회적 위치를 성역화했었고,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은 본인들이 쥔 헤게모니를 실체화하기 위해 이성계와 연합해 그가 이끄는 사병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도티가 주장한 백인으로서의 "자아"를 찾고 구분하기 위해 지배와 수탈의 대상인 유색인종이라는 "피아"를 생산해낸 그 힘을 서구 열강들이 쥘 수 있었던 이유도 서구 열강들이 유색인종들을 무릎 꿇리고 지배할 수 있을 만큼의 무력과 재화를 지녔기 때문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힘은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총과 칼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사고를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무언가 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사 속 권력자들, 그리고 권력을 바꾸고자 했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힘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모두 손에 쥐거나, 모두 쥘 수 있도록 무던한 노력을 들이며 정치행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손에 어떤 힘이 주어지는지, 그 힘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정치학도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일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