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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그리고 국가 -2-

아빠!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져요? 정치학으로 보는 국가의 탄생

by 만두박사

정치학에서 국가의 정의와 본질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가 바로 국가의 탄생입니다.


국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사극 보면 송일국이 부하들이랑 같이 우르르 몰려와서 씬 바뀌면 궁궐이니 성벽이니 다 세워져 있고 백성들도 이주해 왔고 나라가 뚜구닥 뚝딱 만들어지던데... 왜 정치학자들은 이런 시답잖은 주제를 가지고 키배를 벌이는 걸까요?


그야 물론 시답잖은 문제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 학자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시답잖은 문제도 잠깐 생각해보면 보기보다 복잡한 문제기 때문이죠. 사람이 왜 살기 위해 숨을 쉬어야 하는지와 비슷한 문제라고 할까요. 시답잖은데 설명하자니 복잡한 그리고 괜히 숨 쉬는 거 자각해 버려서 고통스러운 그런 문제인 것이지요.


이쯤에서 오늘 진도 나갑니다. 단, 국가의 탄생이란 수박을 핥기 전에 먼저 핥아야 할 수박이 있습니다. 바로 집단행동의 문제입니다.




집단행동의 문제(Collective action problem)


"만약 사회과학에 자연과학과 같은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인류가 집단행동의 문제를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 정치학자, 미상


인간은 가끔 솔로 플레이를 할 때도 있지만, 보통 뭔가를 이루기 위해 팀 플레이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조별 발표를 한다던지, 레이드를 뛴다던지, 아니면 나라를 만든다던지. 혼자서 하면 버겁지만, 함께 하면 분담할 고통을 1/n로 줄이면서 함께 얻는 이득은 동일하거나, 아니면 그로 인해 더욱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을 위해 팀플을 하는 것이겠지요. 파티 플레이 경험치 보너스도 받고 말이죠. 이런 인간의 행위를 사회과학에서는 집단행동(collective action)이라 부릅니다.


이런 집단행동은 필연적으로 몹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팀원 중 누구 하나가 뺑끼(...)를 부릴 수 있다는 위험입니다. 요즘은 조금 더 복잡해졌습니다만, 여전히 사회과학은 모든 개인은 이성적이다(rational individual)는 가정 아래 가설을 세웁니다. 이성적인 사람은 매사에 비용 대비 얻는 이득을 따져가며 비용 대비 최고의 이득을 얻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즉 가성비 중심의 사람인 것이죠.


문제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모여 공공재(public good), 즉 공공의 이득을 위한 집단행동을 할 때 발생합니다. 사실 모두가 모여 팀플을 하면 아주 열심히 해도 얻는 이득은 같고, 뺑끼를 부려도 얻는 이득은 동일하거든요. 그럼 뺑끼를 부려가며 대충 설렁설렁 하게 되면 들이는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들며 비용 대비 얻는 이득을 극대화할 수 있게 됩니다. 아예 하는 척하면서 노력을 들이지 않아 버리는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겠죠. 특히나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런 경우가 더 많아지게 됩니다.


K리그 전설의 그 순간.


결국 모든 순수한 집단행동은 이 집단행동의 문제로 인해 파국으로 치달을 위험이 크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실패한 집단행동만큼이나 공공 이득을 창출하는 데 성공한 집단행동도 참 많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집단행동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대충 두 가지 해결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1) 선택적 이득 (Selective incentive)

바로 집단행동에 공공 이득 외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선택적 이득을 부여하는 방법입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에게 뭐 노력영웅 같은 칭호를 준다던지, 아니면 축구 빅매치 티켓을 우선 구매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던지 하는 이런저런 혜택을 줘서 모두가 열심히 집단행동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을 깔아주자는 식입니다. 만슈어 올슨(Mancur Olson 1965)은 이 방식을 발견하며 어찌나 신박하다고 생각했는지, 선택적 이득이 없는 모든 노동조합은 집단행동의 문제로 인해 붕괴될 것이라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2) 대리인 이론 (Theory of the firm)

다른 하나는 집단 안에서 누가 뺑끼를 부리는지 감시하는 사람을 두어 뺑끼쟁이를 감시, 처단하게 하자는 방법입니다. 감시자는 본인의 역할로 인해 일어나는 공공 이득의 일정 부분은 인센티브로 가져갑니다. 감시자를 고용하는 집단은 비록 공공 이득으로 얻는 이득은 일정 부분 줄어들지만, 그래도 이득없이 니탓 내 탓하며 멱살이나 잡던 시절보다는 훨씬 생산적이니 감시자를 고용하는 게 좋은 선택입니다. 형수도 좋고 시누이도 좋습니다. 모두의 이득을 생각한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집단행동의 문제를 해소할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합리적인 선택을 통한 국가의 탄생


국가의 탄생은 바로 후자에 해당하는 집단행동 보완책이라 하겠습니다. 한 사회 공동체가 겪고 있는 집단행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누가 감시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감시자의 기능이 고도화되며 국가로 발전했다는 식의 주장이죠. 예를 들어, 아이샤 아마드(Aisha Ahmad 2015)는 수많은 군벌이 난립했던 소말리아 내전을 연구해 소말리아 상인들이 수많은 군벌들에게 보호비를 상납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전략적으로 제일 보호세가 저렴한 알 샤바브를 만들고, 전략적으로 밀어 알 샤바브에 의한 소말리아의 일시적인 통일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협력해야 모두가 살아남는 현실에서 개개인이 함께 국가라는 매우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었다는 주장은 정치학에서 합리주의적 제도주의(Rational choice institutionalism)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풀기 힘든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국가 형성을 집단행동으로 볼 때, 누가 이 집단행동을 조직하느냐의 문제죠. 집단행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공재인 국가를 만드는데, 국가를 만드는 것도 영 품이 많이 드는 집단행동입니다. 집단행동 문제의 무한 후퇴가 벌어지는 것이죠. 이걸 정치학은 그냥 "생활 속 칸트 주의자(everyday Kantian)"이라는 개념으로 퉁쳐버립니다. 그냥 어떤 사람들은 뭔가 일을 벌이기 좋아한다면서요. 합리주의적 제도주의로 본 국가 형성 이론은 여기에서 뭔가 석연찮은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론 막 어렵고 도도해 보여도 사실 정치학이 이런 식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돼버린 국가의 탄생


여기에 더해 합리주의적 제도주의와 약간 상반되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또 모든 제도가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결코 합리적인 결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그랬으니까" 또는 "매뉴얼에 이렇게 적혀있으니까" 식으로 타성에 젖어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흔하죠. 또, 합리적 제도주의는 사후 검정(post-hoc)의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막 일이 벌어질 때는 뭐가 뭔지 모르지만, 일을 다 끝내 놓고 뒤돌아보면 뭔가 큰 계획이 있었고, 결과가 합당했음을 절로 믿게 되죠. 사실 막무가내로 우왕좌왕하면서 왔을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수탈과 안전보장을 통해 연명한다는 점에서 국가는 본질적으로 조직폭력배들과 다를 바 없다" -찰스 틸리


여기서 다시 찰스 틸리(Charles Tilly) 등판합니다. 찰스 틸리(1985)는 합리적인 제도주의를 좀 삐딱하게 보며 국가라는 제도는 궁극적으로 상황을 합리적으로 여길 때까지 사람의 팔을 비트는 제도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틸리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조직폭력배가 시장에 들어가서 물건을 막 다 부숴버리고, 자릿세를 안 내면 다시 와서 다 부숴버리겠다는 협박을 하고 갑니다. 그런 협박으로 시장 상인들이 자릿세를 내는 행태는 비록 (물건이 무사할 수 있으니) 합리적이지만, 이건 사실 주입식 합리적 사고방식인 셈이라는 것이죠. 조직폭력배들이 상권을 지키고, 다른 동네 조직폭력배들이 깽판을 놓는 걸 막아준다고 합니다만, 사실 이건 조직폭력배가 없어지면 생기지 않는 문제거든요. 우리도 우리의 근현대사를 통해 우리는 국가라는 조직폭력배들이 반공이니, 백두혈통이니 하며 본인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모습을 수없이 봐 왔지 않습니까?


틸리와 같은 사람들은 국가와 같은 제도는 합리적인 결정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거부합니다. 대신 이 사람들은 제도는 역사적으로 서서히 쌓인 결과이며, 이 결과는 쉽게 경로가 바뀌지 않는 약간의 꾸덕꾸덕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틸리는 대신 전근대 유럽의 중앙집권화를 조명하며 국가의 형성을 전쟁에서 찾습니다.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집단이 다른 폭력을 가진 집단과 맞붙기 위해 재원을 뜯고, 더 강하고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재원 수탈 구조를 강화하는 작업의 연속이 바로 국가라는 주장이지요. 반면에 헨드릭 스프류이트(Hendrik Spruyt 1994)는 전근대 유럽의 중앙집권화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해, 무역의 성행으로 인해 무역을 감독할만한 권력 주체가 필요했다고 봅니다. 이런 권력 주체가 도시국가, 도시 동맹, 또는 국민국가와 같은 모습으로 발전했고, 베스트팔렌 조약 등 역사적인 사건을 거쳐 국민국가와 같은 모습으로 점차 변하게 됐다고 주장합니다. 정치학은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역사적 제도주의(Historical Institutionalism)이라 부릅니다.


물론 문제가 없으면 사회과학이 아니죠. 역사적 제도주의 또한 여러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많은 역사적 제도주의 주장들이 결정론적이지 않는가-는 비판을 종종 받습니다. 역사적 제도주의에 따르면 첫 삽을 잘 떠야 훗날이 편하니까요. 만사가 결정론적으로 변하는 역사적 제도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느 한 제도가 획기적으로 바뀔 수 있는 중대한 분기점 (critical juncture)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이 분기점이 뭔지, 이 분기점이 온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역사적 제도주의가 의미 있긴 하지만, 사회과학의 목적 중 하나인 사회적 패턴을 온전히 규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큰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정치학자들의 키배는 끝을 모릅니다. 사실 정치학이 다 이런 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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