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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박사 Jul 08. 2022

"전쟁의 끝엔 기필코
우리 까레니가 승리합니다"

피울음 서린 까레니 산야, 저항하는 이들의 이야기

이제 시간이 지나 언급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당시 군부 지도자 민 아웅 흘라잉이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에게 평화협상을 재개하자는 초청이 있었습니다. 그 제안을 받을지 말지에 대한 소수민족 단체들 간의 논의, 그리고 그들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움직였으리라 짐작만 하는 주요 각국의 외교전이 치열했었습니다.


그 당시 치앙마이엔 편하게 쓰레빠를 끌며 나타나던 현지 친구들이 갑자기 머리에 힘주고 셔츠를 바지에 넣은 채 나타났고, 인터뷰 도중에도 연구주제보다는 한창 일어나는 정치격변에 대한 얘기가 더 많아졌었습니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도중, 제 친구가 메신저로 문자를 보냈었습니다:


"만두박사, 언제 몇 시에 약속 있어?"

"응 누구누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어떡하지?"

"어, 그 약속 무조건 미루고 그때 나 따라와."


왜 이리 호들갑인가, 공들인 인터뷰를 죄송스레 미뤄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이 무엇인가 궁금해하며 친구와 만났습니다. 같이 만나서 택시를 기다리자 드디어 무슨 영문인지 말을 뗍니다.


"까레니 민족 진보당 (KNPP) 지도자가 여기 와 계셔. 내가 이미 이야기해 놓았으니 같이 만나러 가자."


아이고 아주 조금이라도 언질을 줬으면 저도 머리에 힘 좀 주고 나올 것을. 




"이래 홀쭉해서 어떻게 40년을 투쟁했나 싶지요?"



그분 이끄는 KNPP는 1948년부터 까레니주의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항쟁을 시작해, 1957년에 까렌민족연합(KNU)의 지원을 통해 정치단체로 결성되었습니다. 여성들이 목이 길어 보이도록 목에 고리를 차기 때문에 '롱넥 카렌족'이라 불리는 까얀족이 바로 까레니족의 분파입니다. 태국에서는 까렌족을 '하얀 까렌,' 까레니족을 '빨간 까렌'이라 구분해 부릅니다.


KNPP의 산하 무장단체 까레니군(Karenni Army)은 2021년 군부 쿠데타 초기부터 도시에서 도망치는 학생들을 맞아 태국으로 도망치는 젊은이들의 길을 터 주고 총을 들어 저항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미얀마 민간정부를 위해 싸우는 인민 방위대 구성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까레니족은 작지만 강합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인구수가 고작 30만 명에 불과한 까레니족은 풀뿌리 지역사회를 기반 삼아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을 도입하고, 풀뿌리 지지세를 기반으로 수십 년 동안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수만 명, 즉 민족 인구의 다수가 난민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매홍손 근교에서 만난 그분의 조카도 자기가 10여 년 전에 난민으로 태국에 왔다고 밝혔습니다.


엑소더스 버금가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만, 까레니족은 꿋꿋합니다. KNPP는 2012년에 미얀마 군부와 휴전을 맺었으나, 군부가 주도한 전국 휴전협정(NCA)은 비 휴전 무장단체들과 연대하며 꿋꿋이 거부했습니다. 미얀마의 평화 프로세스는 모든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이 참여하는 포용력 있는 협의여야 한다면서요.


태국 북부를 여행하면 으레 고산족 '관광상품'으로 소개되는 이분들은 사실 까레니족입니다.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아저씨 한분이 밝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왔습니다. 거기서 만난 제 아버지뻘의 그분은 수십 년을 저항한 악명 높은(?) 게릴라 전사라기 보단, 학자 인상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제게 그는 "이래 홀쭉해서 어떻게 40년을 투쟁했나 싶지요? 운이 좋아서 지금껏 살아남았습니다" 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혼자서 책과 씨름하고 외국인과 대화를 하며 영어를 익혔다는 그는 굉장히 유창한 영어로 저와 대화를 했습니다. 


어쩌면 머리에 힘 안 주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안한 복장으로 나타난 그분은 서방 정치학계에서 내전과 반군을 얘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소위 '축재를 하기 위해 싸우는' 군벌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습니다. 그분은 특히 평생을 싸우느라 자녀들에게 물질적으로 신경을 많이 써주지 못한 것에 대해 큰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글에서 저항하는 게 어찌나 힘들었는지! 외국인들이 우리를 취재하러 오면 마치 따지듯이 나한테 묻습니다. '아니, 가난하다면서 어찌 오토바이니, 자동차니, 이런 물건들을 구할 수 있었죠? 하루하루 왜 이리 바쁜가요, 혹시 몰래 돈벌이를 하는 건 아닌가요?' 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라서 그래요. 우리네 세상과 전혀 다른 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거지. 우리 저항군 가족들이 정글 속에서 굶주리며 오랜 시간 동안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가까스로 살림을 꾸렸다는 걸 이해를 못 하는 거에요."


그분은 제게 외국인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 알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오직 인권과 자유를 위해 모든 걸 내버리고 정글로 숨어 들어간 동지들의 어려움과, 그들의 인생이 제대로 이해됐으면 싶다면서요. 


물론 그 와중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2022년 까레니 민족의 날을 맞아 댄스타임을 가지는 까레니군 장병들

 



"진정한 연방 민주주의를 이룩할 마지막 기회"



하지만 까레니족에 대한 질문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합니다. 이번 회동도 역시 주요 화제는 미얀마 내전 정국입니다. 일단 궁금한 것은 냅다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쿠데타 이후 젊은이들이 국경으로 몰려오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쿠데타?" 그분께서 웃으며 장난스레 되묻습니다. 미얀마는 독립이래 세 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그분께서는 세 번의 쿠데타를 모두 겪으셨거든요.


"왜 첫 쿠데타 때는 내가 갓난아기였어요. 두 번째 쿠데타 (8888 운동) 때는 내가 이미 투쟁하고 있을 때였고. 그때 왜 버마 친구들 사가잉으로, 까친으로, 까레니며 까렌으로... 여기저기 많이들 탈출했었죠? 그때 우리가 500명인가 받았었나... 사실 난 그때 '와, 참 많이도 왔다' 생각했었습니다. 아마 전국을 다 합쳐 5천 명인가 빠져나왔었죠?"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가만히 얘기를 멈췄습니다. 버마족과 소수민족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한 배를 탄 순간, 전 버마 학생 민주주의 전선(ABSDF)은 내홍과 재원 부족으로 어이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준비 없이 도시에서 도망친 학생들은 말라리아와 같은 이른바 '정글병'에 쓰러져 죽어나갔고, 내부 갈등이 심해진 부대는 군부가 심은 첩자를 솎아낸다고 학생들끼리 인민재판을 벌여 즉결처형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지금은 그때랑 달라요. 지금도 어린 친구들이 우리 기지로 수없이 오고 있어요. 가만히 얼굴을 살펴보면 젊은이들만 오는 게 아니라 내 나이 또래도 온단 말이지. 학생들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선생님들이 같이 온 거라 합디다." 그분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곤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일어나 이리 거세게 군부에 저항하는 건 미얀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우리네로 도망쳐서 훈련받은 친구들 말고도 버마 안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바다를 이뤘잖아요?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내고, 조직을 해서 같이 연계해 싸우고 말이지. 우리나라에 진정한 연방 민주주의를 이룩할 마지막 기회입니다."


8888 항쟁 중의 양곤. 그 해 버마의 여름은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2022년 2월, 작전중인 까레니군




"과연 NUG가 이길까? 그건 모르지. 하지만..."



미얀마 내전의 향방과 현황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과연 NUG(미얀마 민간정부)가 승리할 수 있을까요? 장기적으로 보아 어떻게 되리라 생각합니까?"


짧은 침묵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지금 단언하기에 쉽지 않은 질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글쎄- 하며 잠깐 생각하던 그분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우리 테이블을 봐주던 어린 미얀마인 직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도 긴가민가한데(...) 같이 동석한 모두는 단박에 그 친구가 미얀마 사람인 걸 알아보고 처음부터 버마어로 소통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 딸, 어디서 왔습니까?"

"저는 로이꺼우 옆 디모소에서 왔어요."

"아이고, 디모소에서 왔습니까?"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오호라' 하며 눈썹이 올라갑니다. 디모소는 까레니 주에 있는 지역입니다. 심지어 까레니족이라고 합니다. 동석한 제 친구가 "이 분이 누군지 아느냐" 물으니 전혀 모르는 눈치입니다.


2022년 1월, 로이꺼우. 전투를 피해 피난하는 까레니 주민들과 전장으로 떠나는 까레니 인민방위대


타향에서 만난 동포가 반가웠는지 그분께서 그 친구에게 여기는 언제 왔느냐, 어떻게 왔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어린 친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 온 지 이제 몇 개월 정도 됐어요. 언니랑 같이 디모소에서 나와 로이따이렝을 경유해서 나왔습니다."


두고 온 고향을 얘기하는 그 친구의 눈가가 빨개지며 잠깐 눈물이 고인 것을 저는 봤습니다. 디모소는 현재 까레니군이 군부와 서로 뺏고 뺏기는 혈전을 치르는 곳입니다. 그 친구가 언급한 '몇 개월 전'엔 까레니군이 인민방위대와 합작해 로이꺼우 시가지로 진격하는 큰 전투가 일어나 수만 명의 피난민이 생겼었습니다. 


아무도 정말 그랬느냐 묻지 못했습니다만, 모두가 그 친구가 그 참상에서 빠져나온 것임을 이해했습니다.




험난한 여정을 통해 태국에 당도한 그 친구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눈 그분은 이야기가 끝나고 맥주를 홀짝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NUG가 이길까? 그건 모르지. 하지만 이 전쟁의 끝엔 기필코 우리 까레니가 승리합니다." 


그는 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습니다.


"최후엔 우리 까레니가 이길 거라고 믿기 때문에 내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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