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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박사 Jul 10. 2022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2022년 미얀마, 저항하는 청년들의 이야기


2022년 7월, 태국-미얀마 국경지대 어딘가에서 청취한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되었습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실명과 지명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형식은 싫어. 그냥 가슴에 담은 얘기나 좀 하자구. 받아 적을 거 있으면 받아 적고."


국경지대 어딘가. 다시 만난 A가 제게 환히 웃어 보이며 말했습니다. 미얀마 인민 방위대 (PDF) 대장인 그는 아직 대학생 티를 못 벗은 갓 어른이 된 친구입니다. 나이는 스물다섯, 군부에 저항하기 전 관광업에 종사했던 그는 영어가 유창했습니다. 그 옆엔 올해 스물둘이 된 B가, 그리고 초등학교 선생님으로서 시민 불복종 운동을 하다 온 스물여덟의 C가 영어 리스닝 연습을 해보겠다며 앉았습니다.


제가 그들을 처음 만난 , 그들은 제게 마음에 맺힌 말이 많다며 먼저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차다  것처럼 티셔츠에 반바지 편한 차림으로 저를 맞은 그들을 보고 '저항군'이란 다소 무거운 단어가 쉽게 떠올려지지 않습니다. 저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 이런  가지고 농담하면  되는데" 반복하며 웃고 떠들던 그들은 영락없는 미얀마 청년들이었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여느 미얀마 청년들이 그렇듯, 그들도 한국 연예인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블랙핑크는 너무 요란해서 별로지만 소녀시대 태연을 참 좋아한다는 A. 방탄소년단이 곧 군대를 가야 한다는 소식에 씁쓸한 입맛을 다셨던 B. 그리고 "왜 한국에 까렌족 아기 하나 있지 않아? 마따 투와. 가수 하는 친구" 하며 완이화의 활동을 한마음으로 반기는 친구들. 그런 그들은 연예계만큼이나 한국의 현대사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도 민주항쟁을 했었지?" A가 물었습니다. "그 시절 한국에 대한 영화를 많이 봤어. 1987도 보고. 택시 운전사도 봤고. 그때 한국처럼 지금 우리도 대학생들이 항쟁을 이끌고 있어"


A는 그는 시위 최전방에서 방패를 들던 방패조였습니다. 그의 고향에선 5월 8일부터 시작된 군부의 총격으로 친구를 여럿 잃고는 무장항쟁의 길로 뛰어들었습니다. 처음엔 몇 달 평화 시위를 하면 이길 거라고 굳게 믿었던 그는 총알이 빗발치고 친구들이 산화하자 무력 없이 승리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시위 현장을 주도하다 군부의 척살 대상이 되어 무장항쟁의 길로 뛰어든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몹시 두렵다고 합니다. 두렵지 않냐는 제 질문에 그는 짦막하게 말을 맺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니까."


REUTERS


"원래 내 꿈은 돈을 모아 아주 좋은 카메라와 망원경을 사서 정글에 들어가 새 관찰을 아주 맛깔나게 하는 거였어." 손님이 왔다는 핑계로 맥주를 꺼내 든 A가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켜곤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돈이 생기면 아주 좋은 총과 조준경을 한껏 사서 정글에 들어가고 싶다는 게 내 꿈이란 말이지."


"미얀마 군부는 무슨 타노스야" 그 얘기를 들은 B가 창가 앞으로 걸어가 담배에 불을 붙이곤 옆에서 낄낄 웃었습니다. "손가락 한번 까딱 할 때마다 사람들 꿈이 퓽- 퓽- 사라져. 뭣 같은." 혁명이 끝나면 얼른 집으로 돌아가 대자로 눕고 싶다는 B는 정글로 떠나기 전에 가족을 먼저 설득해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내가 떠나는 걸 특히 많이 걱정하셨어. 그러시면서도 말씀하시길, '정말 떠나야 한다면, 혁명을 완수하기 전엔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었는데..."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대 이제 골초가 됐다는 B의 목소리엔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 반, 그리고 자기를 지지해 준 어머님에 대한 뿌듯함 반이 섞여 있었습니다.


B는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부대에 자기 말고는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를 쓰는 사람이 없어 부대 내 디자인 도안 작업을 자기가 다 도맡아 한다는 그 친구의 삶은 군부의 유혈진압이 시작되며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군경에게 쫓기던 어느 밤, 그의 친구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져 경찰에게 붙들렸습니다. "그래도 뛸 수밖에 없었어." B가 말했습니다. "아직도 마음속에 큰 죄책감으로 남아있어. 친구를 구하지 못해서." 그 길로 그는 무장항쟁의 길로 뛰어들었습니다.


B가 정글에선 담배를 찾을 수 없다며 대신 줄창 피워댔던 미얀마 시가.




"내가 총을 들리라곤 나도 상상을 못 했어"



"쟤가 사실 우리 부대 최고 저격수야." 한참 더 이야기를 나누던 중, A가 B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B가 배시시 웃으며 제게 표적과의 거리며, 바람의 방향이며를 언급하며 저격하는 방법을 설명해 줍니다. 저격 훈련을 받은 건 아니고 평소 자연과학에 관심이 많아 저격술 이론(?)을 독학했다는 그는 장난기 많은 앳된 청년입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땐 고등학생인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제게 자기가 총을 들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고 얘기했습니다. 생전 총을 한 번도 만져본 적이 없다는 그 친구들은 이제 숙달된 정글 게릴라 전사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전투는 지옥입니다. "처음 전투에 나갈 땐, 아이고 말도 아니었어" B가 얘기합니다. "지금도 똑같아. 펑, 펑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리고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정말 무서워. 죽을 것 같아도 그냥 꾹 참고 저지르는 거야." A는 그들의 첫 전투는 설명도 못할 혼전이었다고 설명해줬습니다. 공격도, 방어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의 혼란.


전장에 나간 이후 그들은 편히 잠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쿠데타 정국 이후부터 지금껏 계속 불면증과 악몽에 시달린다는 그들은 서로 하나씩 꺼내는 악몽과 트라우마 이야기에 서로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직도 차 엔진 소리가 들리면 화들짝 잠이 깨버린다는, 종종 꿈에서 구하지 못한 친구의 모습을 본다는 B, 귓가에서 총소리가 계속 울린다는 A. 그리고 그 사이에서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C.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아마 미얀마 청년들 모두가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할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차라리 무기와 총탄이 많아 마음껏 싸울 수 있으면 더 속 편할 거라며 입을 모으는 그들은 심리적인 부담을 서로 덜어주기 위해 저녁마다 술을 나눠 마시며 서로의 고충과 마음속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고 합니다.


"우리는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았어." B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미얀마 군부가 우리를 그런 괴물로 만들어버린 거야. 걔들이 말하듯 살인 병기, 테러리스트 뭐 그런..." 그가 쏜 미얀마 군부 병사들을 절대로 미워하지 않는다고, 그저 상황이 이렇게 됐을 뿐이라는 B는 제게 살인으로 인한 죄책감은 결코 좋은 경험이 아니라고 덧붙였습니다.


"총은 식칼과 같아. 좋은 사람이 쥐면 좋고, 나쁜 사람이 쥐면 나쁜. 그렇지?" 로이따이렝에서 들은 말이 귀에 맴돕니다 / AFP




"싸움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그저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말아 주세요."



점심때 만났는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싶은지. 한참 웃으면서 서로 먼저 하라고 미루며 말을 고르더니, 결국 막내인 B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청춘과 시간을 바쳤습니다. 제가 도중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봄 혁명은 꼭 승리해야 합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많이도 말고, 아주 조금... 솔직히 많이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까지 갑니다. 우리가 독재에 고통받는 마지막 세대가 되도록.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엔 내내 조용했던 C가 통역을 빌려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 봄 혁명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우리나라는 이미 다른 나라들에 비해 너무나도 뒤처져 있습니다. 동남아 안에서만 비교해봐도 너무나도 낙후되어 있으니까요. 지금은 불가능하겠지만, 이 모든 게 다 끝나면 우리나라에 관심과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우리나라에 더 좋은 보건시설, 더 나은 교육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얼른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도록 빠른 혁명 완수를 위한 지원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A가 말을 꺼냈습니다:


"항상 많은 지지를 보내줘서 감사합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무엇이든 지원이 필요합니다. 독재를 우리 세대에서 끊어내야 합니다. 우리 다음 세대는 더 자유롭고 나은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혁명이 끝나면 우리나라가 얼른 다시 재건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천장을 바라봤습니다. 그러곤 저와 눈을 맞춘 그의 눈시울은 붉었습니다.


"우리가 유명해지고 싶어서, 권력을 얻고 싶어서 이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제 아래에 어린 동생이 넷이 있어요. 아주 어린, 작은 동생들. 저는 이 아이들을 위해 싸웁니다. 제 동생, 그리고 제 다음 동생들 세대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싸웁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싸움은 우리가 하겠습니다. 그저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당신들로부터 민주주의를 배웠습니다. 그러니 NUG를 지지해 주세요. NUG는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합법적인 미얀마 정부입니다."




이 글을 쓰며 언제든지 다시 오라며, 그리고 다음에 올 땐 쌩쏨 위스키 한병 들고 오라며 농을 던진 그들의 미래를 생각해 봤습니다. 내년엔 미얀마에서 볼 수 있겠다는 제 위로에 그들은 웃으며 반신반의합니다. 쿠데타 전 소중히 간직했던 꿈을 이제 다 버렸다는 그들에게 제가 나눠줄 수 있는 위로는 담배 뿐입니다.


내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그들을 볼 수 있길 기원합니다. 그때는 정글 속에서, 또는 국경지대를 오가며 보는 게 아니라 양곤 맥주집 어딘가에서 잘 있었느냐, 새로이 거듭난 조국은 어떠냐 물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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