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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박사 Jan 09. 2023

국경이 무색한 곳, 매홍손

저는 이곳에서 '조미아'를 보았습니다


"만두박사, 그래서 매홍손에선 뭘 한다고?"

"네 여기에서 미얀마 소수민족 정치와 문화 공부를 해요. 박사공부 하고 있어요"

"어어- 정치? 샨족도 공부하는 거야? 그랬구나!"


그게 끝이었습니다. 제가 세 들어 사는 방의 샨족 집주인 아주머니는 제가 뭘 하고 다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제가 평소와 달리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이 아니라, 긴바지(!)를 입은 날에는 주인 아저씨가 '어디 거창한 일 하러 가는 거지?' 묻는 듯 활짝 웃으며 물으시곤 하셨습니다:


"피 [만두박사], 완니 빠이 나이? (만두박사 형, 오늘 어디 가?)"

"마이숭 카 마이숭 카, 떼 꽈 나이쏘이 카 (안녕하세요, 나이소이 가려고요)"

"어어, 오케이!"


그러곤 아저씨도 활짝 핀 웃음과 함께 더 이상 묻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겐 동명의 방콕 소재 갈비국숫집으로 유명한 나이소이, 버마어 화자들끼린 '난쓰웨'라 불리기도 하는 그곳은 미얀마의 소수민족 무장단체인 카레니민족진보당(KNPP)이 주둔하고 있는 난민촌입니다. 매홍손에서 제 소재를 궁금해하시는 현지 분들에게 제가 종종 '저 나이소이 갔다 왔어요'라고 말했던 건 그들에게 '저 카레니군 만나고 왔어요'로 들렸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 봅니다.


인터뷰하러 가는 길.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선일까? 국경이 무색한 매홍손


물론 매홍손에는 카레니군만 섞여 들어간 게 아닙니다. 매홍손 읍내 안에도 여러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의 연락소가 버젓이 문을 열고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개중 하나는 제가 업무를 보기 위해 단골로 드나든 카페 바로 옆에 있어서(...) 종종 면식이 있는 반군 친구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노라면 캐나다에선 상상도 못 했을 일이 내 일상이 됐구나, 하며 기분이 묘하기도 했습니다.


또, 스냅샷 맛집으로 유명한 반락타이는 원래 아편중개지로, 지금도 미얀마 소수민족 반군의 자금조달, 그리고 바깥 세상으로의 통행로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이곳엔 태국 국경수비대는 물론, 근교에 샨주 남부군, 빠오민족해방군, 그리고 미얀마군은 물론 친 미얀마 군부 국경수비대와 민병대 등의 주둔지가 미얀마-태국 국경을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있답니다.*


* 어찌나 가까운지 제 친구 중 하나는 반락타이 근교 샨주남부군 기지에 구호활동을 하러 들어간 어느 저녁에, 미얀마 군부의 박격포 포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포탄 터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어떻게 탈출해야 하나 당황한 그에게 남부군 지휘관이 태평하게 "저 길로 5분만 걸어 내려가면 태국이니까 일단 저기로 가 있어"라고 했다고(...)


반락타이입니다. 이름값과는 달리 사실 관광객이 볼 건 별로 없습니다 ㅎ_ㅎ


그리고 오토바이 라이더들의 인생 코스로 주로 꼽히는 매홍손 루프의 중간지점인 매 사리앙에서 조금 내려가면 카렌민족해방군(KNU)의 본부가 나옵니다.


매홍손에서 만난 한 카렌족 친구는 매홍손 남부부터 펼쳐지는 땅을 "커뚜레이(Kawthoolei)," 즉 카렌민족의 나라라 숨죽여 불렀습니다. 그는 매홍손에 사는 카렌족 청년들이 '강을 넘어' 커뚜레이로 자주 간다고 얘기했습니다.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노릇을 하는 모에이 강을 건너 카렌민족해방군 영토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말투나 관습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들의 민족 문화와 현 상황을 배우기 위해 도강을 한다고 합니다


저보다 한참 어린 그 친구는 저와 카렌족 얘기를 하면서 제가 의아할 정도로 단 한 번도 국경이니, 국가니,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강을 건너' 커뚜레이로 갈 뿐이라 말했습니다. 그가 상상하는 커뚜레이도 국경이 무색했습니다. "커뚜레이"에서 볼 만한 곳을 추천해달라는 저에게 그는 -미얀마 카렌주가 아닌- 태국 안에 있는 명소들을 여럿 추천해 줬습니다. 어쩌면 그에게 국경은 그저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선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국경'을 넘어 어느 국가에 붙어있던, 커뚜레이는 커뚜레이라는 생각이 아닐까요?


문제의 그 트럭 안에서. 차 뒤편에 호랑이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그 트럭을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편, 로이따이렝에 다시금 들어갔다 나오던 날, 샨주 남부군의 호의로 연락장교의 트럭을 얻어 타고 매홍손까지 편하게 온 적이 있었습니다. 자택에서 매홍손까지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길인데 뒷자리에 아내분을 태우고 저와 영어회화 연습을 하며 싱글벙글 산길을 달립니다. 너무 미안한 나머지 제가 먼저 얘기를 꺼내봅니다:


"정말 먼 길인데, 데려다줘서 너무 고마워요. 외국인이 폐를 끼쳐서 너무 미안하고요."


"에이, 괜찮아. 문제없어. 나도 어차피 매홍손 가려던 참인걸." 


그리고 그가 기어를 바꿔잡곤 말을 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매홍손에 계시거든."


샨주에서 평생을 보내 태국 연락소보단 샨주가 더 편하다는, 사실 태국어도 잘 못한다는 그의 모친은 매홍손에 거주하고 계셨습니다 (...) 그도 그럴 것이, 매홍손은 원래 샨족 짜오파가 지배하던 마욱마이(Mawkmai)국의 영토였으나, 19세기 말 영국과 태국이 국경선 정리를 하면서 태국에 할양된 영토입니다. 태국이 된 지 이제 백 년이 조금 넘은 셈이죠. 매홍손주 인구의 50% 이상이 샨족인 이유도 거기에 있답니다. 제 친구, 그리고 이 남부군 장교와 같은 사람들에게 매홍손은 '그저 태국 정부의 통치를 받을 뿐'인 지역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매홍손의 태국 국경수비대나 경찰들도 여러모로 '사바이 사바이' 한 경우가 많습니다. 도로변에 검문소를 세우고 이 잡듯 오토바이 헬멧 미착용자를 걸러내던 굳은 얼굴의 치앙마이 경찰들, 그리고 검문소에서 불법 도경자들을 잡아내려고 바득바득 버스 승객의 신분증을 검사하던 긴장미 넘치던 빠이, 치앙다오 근교의 국경수비대의 모습은, 적어도 전 매홍손 주변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왠지 이 사바이 사바이함에 뭔가 얽힌 사연이 있는 거 같긴 한데... 굳이 물어보진 않았습니다.


"여기 올때 검문소 없었어?" 


언젠가 저와 친하게 지낸 까레니 친구가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사는 동네는 경찰이 불법노동자들을 단속하려고 마을 들어가는 길목에 정기적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신분증 검사를 한다고 합니다. 아마 제가 방문한 그 날이 단속 뜨는 타이밍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없었는데. 경찰 검문소가 있으면 많이 귀찮아?" 제가 되물었습니다. 


"음... 아니! 사실 별 문제 없어." 그 친구가 잠깐 고민하다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가 설명하길, 행여나 자기를 문제삼는 경찰 아저씨가 있으면 그냥 간식비(...)가 좀 급하신 거라며, 서로 양보하면 큰 불편함은 없다고 합니다. 아마 그 오묘한 룰(?)을 잘 모르는 외국인인 제가 혹시 불편함을 겪진 않았을까 걱정해서 물어본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국경수비대나 검문소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샨족 문화제 중, 각기 다른 자기 민족의 전통복장을 입고 대기하는 어린이들. 매홍손은 이런 곳입니다.


모두가 섞여사는 이곳이 조미아일까요?


"아저씨, 샨족인가요?" 


어느 동네 둔치에 앉아 저를 '까올리(한국)'라 부른 동네 아저씨들과 아이스크림을 먹던 중, 제가 문득 물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모르긴 몰라도 얼굴 생김새나, 억양이 전여 태국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응 난 샨족 아니야. 나는 리수. 저 아저씨는 카렌."


"헬로! 내가 샨족 사람이야!" 조금 멀찍이서 아이스크림을 잡수시던 어르신이 머리를 불쑥 들고 외쳤습니다.


"여기는 다 모여 살아." 리수족 아저씨가 아이스크림을 드시다 말고 말을 이었습니다. 


"샨, 카리앙 댕(카레니), 리수, 빠오... 근데 까올리, 너 블랙핑크 알아? 라리사, 지수? 지수가 참 예뻐."


매홍손은 국경이 무색한 만큼, 굉장히 다양한 문화와 민족들이 어울려 모여사는 곳이었습니다. 비록 다수 민족은 샨족이고, 지역의 공용어는 태국어지만, 읍내에서 조금만 나가도 고개마다, 강가마다 쓰이는 언어와 입는 복장이 바뀌곤 합니다. 동네 어른들과 청년들은 지역을 가리킬 때 "저기 카렌족 마을," 또는 "샨족 시골" 등등으로 부르곤 했습니다.


과거 어느 학자는 여러 민족이 얽혀사는 동남아 북부의 산악지대를 '조미아 (Zomia)'라 불렀습니다. 국가정부의 통제가 제대로 미치지 않고, 해발에 따라 사는 민족이 달라지는 특이한 곳이라고요. 정치학자 겸 사회학자 제임스 스콧은 한술 더 떠 이 조미아에 사는 사람들은 평야지대에서 생겨난 국가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쳐 좀 더 느슨한 무정부 사회를 만들려 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 주장하기도 했답니다.


스콧의 주장이 얼마나 일리 있는지는 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스콧 또한 제가 본 아주 느슨한 국가의 통제력, 그리고 국경이 무색한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상을 똑같이 보고 느낀 게 분명합니다. 


매홍손에선 도시에서 맡을 없는 자유의 향기가 희미하나마 느껴집니다.




카레니 사람들이 많이 사는 나이소이엔 락타소이 광고가 버마어로 붙었습니다. 비타민과 미네랄이 많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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