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by 이단

라틴어로 가면, 탈이라는 뜻이다.

고대 로마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칭하는 말이었으나, 이 가면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배역, 성격, 사회적 위치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쓰는 ‘사회적 가면’이라고도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씩은 착용하고 있는 그것이다.

페르소나는 꼭 직장에서의 모습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적용되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부기장이라는 가면을 쓰고 출근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공항 청사를 통과하면서부터 시작이다.

비행 가방을 끌고 유니폼을 입은 모습에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특히 승객들에게 신뢰를 줘야 하는 안전의 책임자로서, 깔끔한 외모와 잘 다려진 유니폼, 진중한 표정으로 출근길에 서는 것이 응당 조종사로서 그날 비행을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라고 생각된다.


청사를 지나 브리핑룸에 도착했다.

수많은 기장, 부기장들과 객실승무원들이 비행 준비로 분주하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비행 준비에 임한다.


조종사는 승객뿐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CRM(Crew Resource Management)이라는 개념으로 이미 Airline 문화에서는 필수 과목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는 서로의 자리에서 역할을 수행했을 때 안전 운항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개념인데, 그 근간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조종실에 들어섰다.

승객이 탑승하고 탑승교(Bridge)가 떨어진다.

이제 우리 일이다.

비행기는 Gate를 떠났고, 다음 목적지의 Gate에 접현하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1평 남짓되는 공간에 짧게는 1~2시간, 길게는 4~5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단둘이 있게 된다.

그것도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 둘이서 말이다.


요즘 말로 Small talk라고 했던가.

대부분의 경우 Small talk은 연애 초, 어색한 남녀가 서로에게 관심을 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된다.


물론 기장님께 관심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지만, 조종석에서도 이는 요긴하게 쓰인다.

어떤 중요한 정보 전달이나 결론 도출이 목적이 아닌, 가볍고 일상적인 대화를 시도한다.

이를테면 날씨, 주말, 비행 스케줄, 자녀, 가벼운 경험담 등 즉각적인 의견 충돌이 없는 주제로 가볍게 대화를 시작한다.


목적은 단순하다.

“나는 당신에게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이 공간은 안전합니다.”

“우리는 같은 팀 혹은 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즉, 사회적 마찰을 줄이기 위한 하나의 윤활유로 쓰인다.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은 ‘Small talk = 의미 없는 말’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Small talk은 의미 없는 말이 아니라, 의미를 만들기 전 단계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침묵이 불편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위계와 거리감을 완충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관계의 상태를 조율하는 대화랄까.


말 그대로 Small talk일 뿐이지만, 이를 잘하는 사람이 있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일부 부기장들 중에는 성글성글 웃으며 편안하게 농담을 잘 주고받는 부기장들도 있는데, 그들의 능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쉬는 날조차 친구들을 만나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필자는, 사실 페르소나를 쓰고 꾸역꾸역 Small talk을 만들어내는 순간이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 효과는 확실하다.

이를테면 레이오버 비행을 간다고 가정해 보자.

보통 4~5시간을 비행해 목적지에 다다른다.

“기장님, 이번에 가서 계획 있으십니까?”

단 한마디가 대부분의 상황을 좋게 만든다.


식사라도 한 끼 하자는 암묵적인 제안.

심지어 기장님이 계획이 있어 이를 거절하더라도 상관없다.

대부분의 경우, 식사를 한 번 함께한 것과 거의 같은 효과를 낸다.

레이오버 후 귀국하기 위해 다시 만났을 때,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마저 달라진다.


80%가 편해지기 위한 20%의 희생 같은 느낌일까.


각각의 상황에 사용하는 페르소나는 저마다 다른 필터가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편안한 집일지라도, 오늘 비행에서 기장님과 있었던 어떤 트러블이나 요즘 들어 착륙이 잘되지 않는다거나, Approach 구간에서 고도 처리나 속도 처리를 잘 못해 자책했던 이야기를 집에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종 교육을 받았던 동기들에게는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런 부분에서는 집에서보다 동기들이 훨씬 더 편할 것이다.


페르소나가 꼭 사회적 관계에서만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가면을 쓴다.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때로는 누군가의 친구로서, 또 부모님의 아들로서의 페르소나다.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에 따라 말투와 표정, 감정의 온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나열하자면 복잡하지만, 언제나 버거운 일만은 아니다.

때로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자연스레 페르소나를 갈아 끼운다.

이렇듯 이 행위 자체는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삶의 일부일 뿐이다.


모든 페르소나를 벗어던진 채,

아무 설명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이

우리에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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