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총량의 법칙

by 이단

‘행복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 어릴 적 내가 철썩같이 믿었던 법칙이다.

모든 인간의 일생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양은 이미 정해져 있고, 시기만 다를 뿐 결국 모두가 같은 총량만큼의 행복과 불행을 경험한다는 믿음이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다소 비논리적인 주장일지도 모른다.

전쟁이나 가난으로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족의 삶과, 선진국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가족의 삶을 비교해보면 누구라도 두 가족의 행복 총량이 같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행복이나 불행의 ‘양’보다 그것을 느끼는 ‘기준’이 다를 것이다.

생활 기반이 열악한 국가의 한 가족에게 따뜻한 밥 한 끼는 그 어떤 존재보다도 소중하며, 짧지만 강렬한 행복을 선사한다.

그러나 같은 밥 한 끼를 선진국의 가족에게 제공한다고 해서 그들이 행복을 느낄 가능성은 적다.

익숙하고 당연한 것은 인간에게 새로운 자극이나 행복제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비행을 공부하며 ‘메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Maslow’s hierarchy of needs)’을 접한 적이 있다.

이 이론은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분류한다.

1. 생리적 욕구(음식, 물, 잠, 주거 등 기본 생존)

2. 안전의 욕구(신체적 안전)

3. 사회적 욕구(애정, 소속감, 가족 관계)

4. 존중의 욕구(자존감, 타인의 존경)

5. 자아실현의 욕구(성장, 창의, 자기실현)

순서로 구성된다.


즉,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어야 안전의 욕구가 의미를 갖고, 그다음 단계가 충족되어야 상위 단계의 욕구가 생긴다는 개념이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하며, 사람마다 처한 환경은 모두 다르다.

거시적으로는 태어난 국가의 사회 구조나 이념, 미시적으로는 가정의 환경까지도 인간의 욕구 단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이론을 적용해본다면, 생활 기반이 열악한 지역의 가족은 1·2단계 수준의 욕구에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선진국의 가족은 이미 3~5단계의 욕구를 경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구분은 단순히 국가 간의 차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와 정보화된 현대 사회를 비교해도 비슷한 양상이 드러난다.


나는 정보화된 현대의 선진국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보호 아래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충족했고, 학교생활을 통해 사회적 욕구를 경험하며, 이후 자아실현을 위해 살아왔다.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꿈을 이뤘을 때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산업화 이전의 농경사회를 살아가는 농부에게, 혹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역에서 살아가는 가장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도 풍작을 거두어 가족과 나눌 수 있었던 날, 혹은 가족이 함께 하루를 무사히 마쳤던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과연 그들에게 소중한 행복이 내게는 숨 쉬듯 당연한 일이라고 하여, 내가 더 행복한 사람일까?

당연한 듯 밥을 먹고, 당연한 듯 옷을 입고, 더 큰 차와 더 큰 집을 갖기 위해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아이들을 전쟁터 같은 경쟁사회로 떠미는 우리의 삶이 오히려 더 불행한 것은 아닐까?


인터넷 보급률이 낮은 지역의 젊은이들은 애초에 ‘비교할 대상’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양날의 검이다.

비교 대상이 없다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동시에 타인과의 비교 없이 스스로의 행복에 충실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 ‘비교’가 일상이 되었다.


행복지수가 세계적으로 높기로 알려졌던 방글라데시는 스마트폰 보급 이후 오히려 행복지수가 하락했다.

인터넷과 SNS는 세상을 연결했지만, 동시에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만들었다.

‘남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이 개인의 일상 깊숙이 침투했다.


얼마 전, 한 콘서트장에서 가수의 시점에서 찍은 사진을 보았다.

관객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들고 공연을 촬영하고 있었다.

실물을 눈앞에 두고도 말이다.

과연 그 영상을 살면서 세 번이라도 다시 볼까?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 나오는 한 대사가 떠올랐다.

사진작가 숀 오코넬은 기다림 끝에 표범을 마주하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월터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 좋으면 가끔 찍지 않아.

개인적으론 완벽한 순간을 카메라로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


휴양지의 해변에서 가족과 즐기는 해수욕 장면을 꼭 SNS에 게시해야만 행복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건 가족과의 시간이 행복한 것일까, SNS에 게시하는 행위가 행복한 것일까?


20대에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시간과 체력, 금전, 그리고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그때 나는 철저한 ‘행복 총량론 신봉자’였다.

유튜브를 보거나 친구들과 술자리를 즐기며 찰나의 행복을 느낄 때면,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곤 했다.

지금 행복해버리면 마치 나중의 행복이 멀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행복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 찾아오는 ‘결과’가 아니라,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 속에서도 얼마든지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원하던 일을 하고 있어도 여전히 마음이 불안했던 이유는, 행복을 미래의 보상처럼 여겼기 때문이었다.

결국 행복은 나중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제는 행복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믿기보단, 주어진 순간을 온전히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행복은 나중을 위해 아껴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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