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on-Commissioned Officer
당직근무 다음날 아침은 유난히 바빴다.
헬리콥터를 운용하는 항공부대에서 근무했는데, 당직근무자의 근무 다음날 아침은 항상 MOC-지상작동점검-으로 시작해야 했고, 점호가 끝났지만 아직 잠이 덜 깬 병사들을 이끌고 격납고로 향했다. 부대 바로 옆 활주로에서는 아침부터 국내/외 각지로 향하는 민항기들이 줄지어 이륙하고 있었고, 전투기들은 훈련을 위해 힘차게 날아올랐으며, 우리도 그 바쁜 일상에 동참하듯 분주히 움직였다.
헬기를 격납고에서 계류장으로 이동시켰고, GPU-지상전원장비-를 이용하여 헬리콥터에 전원을 공급했으며, 정비사들의 Thumbs up-일명따봉- 사인에 이어 터빈엔진의 부웅~ 하는 굉음과 함께 헬리콥터의 로터가 힘차게 돌아갔다.
며칠 전 나의 첫 비행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찼던 나는 오랜만에 듣는 힘찬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기류는 안정적이었고, 구름은 적절히 높은 고도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첫 비행은 조금은 특이했던 교관님과의 비행이었다. 나이가 좀 있으셨으며, 항공사에 입사하는 것보다도 정말 비행이 좋아서 비행을 하는 느낌을 주시는 분이었다. 일명 항덕-항공덕후-.
다른 곳에 마음이 있어서였을까? 열심히 하려다가도 종종 군생활에 환멸을 느꼈고, 특히 나를 지치게 했던 몇몇 사건들은 생생한 기억과 함께, 수년간 써왔던 일기장의 구석구석에 그날의 감정과 함께 남아있다.
오늘은 비행보다는 필자의 군생활에 대해 느꼈던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번 이야기는 누군가에게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당시에 느꼈던 그 불평과, 만족스럽지 못했던 나의 환경이 내가 정진하는 데 있어서 더 도움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기에... 20대 중반, 꿈 많던 당시의 일기를 참고하여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훈련소와 부사관 학교에서의 마음가짐은 북한군 열이 덤벼도 때려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실로 훈련을 담당했던 간부들은 체계적이며 멋있었고, 목숨 바쳐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느꼈었다.
밤새어 근무한 당직근무자는 오후면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정기 건강검진이 있어서 근무휴식시간을 통해 정기건강검진을 받았다. 몇 년 전 시력교정술에도 다행히 시력은 양안 2.0을 잘 유지해주고 있었다. 신경 쓰였던 치아도 이상 없단다.. 그래도 이는 잘 닦자..
평소 느꼈던 군복 입은 군인에 대한 생각들과 요즈음 들어 다시금 깨닫는 군의 현실. 당직근무 간 부사관으로 복무했던 친구와의 통화 그리고 오랜만에 본의 아니게 전투복 차림으로 시내를 활보하게 되며 느꼈던 부분들을 끄적여보려 한다.
1.
당시 군의 계층과 구조 자체의 문제. 시대적 배경에서 봤을 때 육해공 3군의 전반적인 구조가 비슷했으리라 짐작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타 병과, 타 군의 계층구조가 어떠한지 잘 모르기 때문에 내 이야기는 수년간 직접 보고 느낀 집단과 계층에 한한다.
9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 이후 당시의 서민신용카드 사용권장 정책과 심각한 가계 부채.. 그리고 난공불락일 것만 같았던, 나라의 존망을 가릴 대기업들이 극심한 부채로 줄도산했다. 90년대 중반에 들어선 우리나라는 IMF라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치닫는다.. 필자 역시 아버지의 사업이 힘들어져, 대도시의 아파트에서 작은 도시의 주택으로 이사를 갔고, 하루가 멀다 하고 다퉜던 부모님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지 머리털이 좀 자라고서야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이 우리가 시대를 거꾸로 타고 올라가 당시의 청년들-화두가 될 대부분의. 현재의 선임위치에, 혹은 전역을 앞두고 있는-을 나무라거나 원망하지만은 못할 이유이다. 그 삭막했던 경제위기 속에 살아남아야 할 위기를 몸소 느껴보지 못했다면 말이다..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잘못도 아니다. 나였어도 상황이 그러했다면 군 장기복무에 대한 마음이 생겼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에서의 군의 급작스런 다세의 장기복무 수용은 이후 수년간 장기복무자를 뽑아내지 못하는 과초과 인원구조를 만들어버렸고, 시간이 지나며 사회 속에 하나의 역구조 집단-역피라미드 형태-을 만들어 버렸다. 이 것은 분명 우리뿐 아니라 과반수 이상이 진급할 자리조차 없는 그네들에게도 큰 문제점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수년간 뼈저리게 느껴온 군의 병패는 머리가 너무 커져버린 수많은 커맨더-지휘관, 지휘자-들의 명령 속에 아랫사람들은 죽어나는 아이러니한 구조를 점점 키워 필자가 군생활하던 당시는 극에 달했던 상황이었다. 한참 힘을 써야 할 중간계층은 대부분 장기복무 심사에 탈락하여 원치 않는 전역을 해야 했고, 이는 아랫사람들이 견디기에 너무 힘든 상황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것의 단적인 예는 특히 업무분장이 되어있지 않으나, 여러 명이 함께 움직여야 할 때 여실히 드러났다.
예를 들어, 훈련용 텐트를 친다고 하자. 4-5명의 우리는-몇 안 되는 후배들과 병사들, 이하 우리-삽과 망치를 들고 분주히 움직인다. 중간 계층은 없다. 군번으로 치면 20년 정도 차이는 10명이 넘는 커맨더들은 그저 뒷짐 지고 바라보고 있다. 각자의 경험과 요령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수많은 명령들을 쏟아냈다. 그 속에서 우왕좌왕하던 우리는 누구의 명령도 명쾌하게 소화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치인다. 그네들의 눈에는 우리의 행동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물론,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그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우리의 능력이 부족했을 수도 있을까?-
10명이 넘는 수많은 커맨더들의 끝없는 명령을 수행하며, 단기 혹은 연장복무라는 수년여 간-짧게는 4년 길게는 7년-의 군생활을 보내며 우리의 군에 대한 미움과 앙금은 점점 커져만 갔으며, 적잖은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그들은 아무것도 책임져 주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이 입버릇처럼 했던 말들 중 하나가, `너희에게 도움을 줄 능력은 안되지만,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은 선임이라면 누구나 가능하다`는 말이다. 장기복무를 하는 것을 도와줄 능력은 없었으나, 자의에 의해 장기복무를 하지 않고 전역하는 사람을 마치 집단에 적응하지 못하고,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치부하곤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취급 속에 적절한 봉급을 받으며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단 하나를 위해 군생활을 유지하기에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너무나 많았다.
2.
서두에서 예고했던 것처럼 정기 신체검사가 끝난 뒤 본의 아니게 전투복 차림으로 시내를 활보하게 되었다. 병사들과는 다른 계급이어서 일까, 느껴질 정도의 시선이 쏟아진다.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길에서 마음껏 웃을 수도, 맘 편히 흡연도 할 수 없으며 불의를 보거나 분명히 누군가 중재를 해야 할 상황에서도, 우리는 그 상황을 피해야만 한다.. 그냥 그렇게 교육받았다. 싸움이 났다면? 피해라. 그렇게 중요하다고 교육받는 '대군 신뢰도'에 금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모노레일에서 여자 기관사와 진상 아저씨의 싸움이 있었다. 누가 봐도 아저씨의 잘못 이었으며,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지만, 난 그저 그 옆에 서 있었다.. 아니, 오히려 숨으려 했다. 누구 하나 나서서 진상 아저씨의 듣기 거북한 육두문자세례를 막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크나큰 회의감이 찾아왔다.. 그것은 어떤 사회적 통념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군복만 입고 있지 않았어도 나는 그 상황을 분명히 중재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무슨 상황인가?..
당시 방영했던 '태양의 후예'를 보며 전역한 친구들과 우스개 소리로 -티브이에 나오는-저런 군인은 실제로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그러했으나, 요즘 내가 느끼고 있는 부분은 그것과 조금은 다르다. 그것이 현실적일 수 없는 이유는 유시진 대위가 너무 잘생겨서도, 윤명주 중위가 너무 예뻐서도 아니다..
작품 속 유시진 대위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군인은 명예로워야 한다.`
오늘 내가 했던 방관자로서의 행동은 과연 명예로웠던가? 대군 신뢰도에 금이가지 않게 하기 위한, 교육받았던 대로, 상황을 회피하려 했던 그 행동은 옳았던 건가?
하나의 작은 사건으로도 수많은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30년 넘게 군에 헌신한 장군들 수명의 명패가 태풍 속 헌 지붕처럼 내동댕이 쳐진다.. 과도한 여론의식에 과연, 군은 명예로워질 수 있을 것인가?
어쩌다 이 군대가, 사고 치지 않고 무난한 것이 목표가 된 집단이 되었는가. 이것이 다문 민간인과의 관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민간인 앞 사회 속의 군인은 그 어떤 부대의 지휘관도, 선임 간부들도 한없이 작아진다. 그러나 그들은 '후임'이라는 나약한 존재들에게 한없이 강해진다.
잔을 돌려 술을 마시고, 술을 잘 못해도 마셔야 하며, 마지막엔 후배들을 데리고 꼭 노래방에 가야 하는 미개한 회식문화가 남아있었으며, 아들 같은 후배들을 등쳐먹고 나무라는 데 있어 그것이 당연하고, 우리는 한없이 조아리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부당한 처사가 존재한다.. 실로 존재했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것만이 전부인 군대라는 집단에서 어찌 군이 명예롭고,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와 내 수많은 동기들 그리고 후배들 중 일부는 시간이 지나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의 군에 대한 인식과 믿음 그것이 어떠할지?.. 우리는 남에 나라 국민이 아니다. 군인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이며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다.
지극히 개인적 입장에서 군복을 입는다는 것은, 명예롭다기보다는 이 시대의 군인들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저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이들의 비겁한 변명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3.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어딘가에 소속되기 시작하여, 단 한순간도 어느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를 만끽한 적이 없다. 평일에 휴가를 내어 시내, 회사들이 줄지어진 빌딩 숲, 대학가 등을 활보해 보면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젊은 피들의 땀과 노력, 그리고 활기찬 세상.. 그리고 호락호락하진 않겠지만, 우리 앞에 펼쳐질 수많은 기회들.
7년을 군에서 지내오며 나도 비슷했던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매너리즘에 빠질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분명 쉽지 않다. 밖의 세상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군에서 쌓은 경력과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인해 Plan B를 보장받을 수 있었으며,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노력해서 이뤄가고 있었다.
요즘 후배들은 쉽지 않은 시험들을, 기성간부들이 칭하는 똑똑한 '신세대 장병'들은 몸소 이뤄가며 우리의 가능성은 어떤 것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상황에 국한되어 맞춰가며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이를 수년간 충분히 느꼈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내가 살아가야 할 방향인지 감이 올 것만 같았다.
군에서의 그간의 노력을 경력이라는 방법으로나마 보상받아 Plan B로 삼아놓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날개를 펼쳐볼 수도, 그것을 발판 삼아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도 되어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스트레스받을 것도 없다.
그저 이 좁은 울타리 속에 자신들이 마치 뭐라도 되는 것 마냥 떵떵거리며 사는 일부-대다수 일지도..- 멍청이들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빼앗길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 내가 싫으면 그저 울타리 밖으로 나오면 된다. 당시 쓰레기 같았던 장기복무 시스템 속에 수많은 이들의 젊음이 낭비되는 것은 사실이나.. 정보의 부족이라고는 해도 앞서서의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했던 과거는 우리의 업보이며,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저 우리는 준비해서, 나아가고, 사랑하며 살면 된다.
군에서 얻은 것은 그저 살아남는 방법과, 진심을 함께했던 몇몇 동료들.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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