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혹은 열심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주말 오전이었다.
토익 시험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눈물이라는 걸 흘려본 게 얼마만일까? 장대비 속에 숨어 한참을 울었다.
웃기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 시험이었다. 첫 토익 시험에서 일명 ‘신발사이즈’와 비슷한 점수를 경험한 후, 한 달 남짓 토익학원을 다니고 시험을 쳤다. LC -듣기- 시험이 끝나고, 일제히 RC -독해- 시험을 풀기 시작했다. 두 번째 토익이지만 나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너무 잘해서? 아니…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찍고 넘기다 보니 시간이 넘쳐흘렀다. 너무 빨리 시험을 마친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학생들, 비슷한 또래의 20대, 40-50대로 보이는 만학도들 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펜대가 열심히 굴러갔다. 왜 나는 이 장면이 그토록 충격적이었을까? 사실 학군지가 아닌 적당한 동네의 적당한 학교를 졸업하고, 전문학사를 취득하기까지 코피가 터지도록 공부를 할 일은 없었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이유야 각기 다르겠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말을 할애하여 자신의 커리어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는 적당히 노력하며 적당히 살아가도 되는 위치에서 항상 딱 그 정도 노력을 하며 살아왔었다.
’ 토익준비 한 달 정도면 700은 넘는다더라, 잘하는 사람들은 800도 넘긴다더라 ‘라는 말을 듣고, 내가 보통의 인간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던 나는, 그래도 700은 넘겠지 라는 생각으로 시험장으로 향했었다. 사실 적당히 준비했다. 퇴근하고 학원에서 공부한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위안 삼으려 했었던 거 같다. 그렇게 적당히 하면 적당한 점수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결과를 보지 않았지만 점수를 짐작할 수는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당시 850은 넘기고자 했던 목표를 세웠었는데 200점은 모자란 점수를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적당히’ 노력하며, 사실 이걸 노력이라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적당히 놀며 적당히 살아오던 나는 정말 열심히 하는 게 뭔지 잘 몰랐던 거 같다. 그러던 나에게 이 날이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억수같이 쏟아지던 장대비 속에 숨어 차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이번 시험을 망쳐서 그런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안일했던 지나온 나의 나날들에 대한 분노(?) 같은 거였다.
첫 비행 이후, 보다 열정적으로 비행하고 싶었으나, 군생활을 지속하며 비행을 배운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스물여섯..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시작이었던 거 같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보다 무모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의 용기로는 도저히 시작할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비행교육비를 충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금전사정, 학력은 전문대졸, 700점도 안 되는 토익성적에 회화는 전화영어를 갓 시작하여 걸음마 수준이었다. 소위 말하는 조종사로서의 역량에 있어 채워가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것은 수많은 돈과 시간이 투자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토익 시험장에서의 충격요법(?)을 시작으로, 정말 열심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편입을 통해 학사학위를 취득하고, 석사학위를 취득할 계획을 세웠다. 비행교육비와 학비를 충당하며 생활한다는 것은 해본 사람만 알 것이다. 육군 중사의 월급으로는 사실 돈을 안 써야 수지타산이 겨우 맞을까 말까 한 정도였다. 일하면서 틈틈이 대리운전을 하며 약간의 생활비를 충당했고, 시간을 쪼개 비행을 하러 다녔다. 너무 힘들고 지친 나날들을 보냈었다. 20대 중반까지도 열심히 만나던 친구들과도 왕래가 없으니 자연스레 소원해졌고, 물리적으로 가능한 시간적 물적 투자를 통해 비행에 올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비행을 하는 날이면 그간의 피로가 모두 날아갈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원동력을 얻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통칭 General aviation이라고 칭하는 Flight academy 들은 대부분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유니폼을 입지 않아도 상관없었으며, 법적으로 필요한 지상학술 교육을 제공하지만, 에어라인 입사를 위해 필요한 역량들은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법적 요구사항들과 비행시간만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곳이었다. 비록 프로펠러 훈련기였지만, 나에게 있어서 비행을 한다는 것은 평상시에 정비사 업무를 하며 동경했던 Cockpit-조종실-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매우 특별하게 느껴졌으며, 스스로 그것을 더 특별한 일로 만들려고 노력했었다. 이제 갓 비행을 시작한 조종 초짜가 사설비행교육원에서 선글라스에 유니폼, 넥타이까지 챙겨 입고 나오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웃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통상 사설비행교육원에서 학생들은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비행하는 분위기였기에- 하지만 나는 특별함을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었고,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에서 오는 마음가짐의 차이와 그 힘을 믿었었다.
코로나19 이전, 사설비행교육원이 망하고 생겨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자가용 면허도 취득하지 않은 나에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솔로비행을 앞두고 비행교육원이 망해버렸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발 빠르게 움직여 남은 비행교육 비용은 정상적으로 환불받았다. 이로 인해 약 1년 정도의 공백이 생겨버렸고, 다른 역량들을 채우는 것에 집중하고자 했다.
학사학위 취득 후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했다. 최종학력이기에 돈만내고 취득한다는, 종전의 전공과도 관계없는 아무 대학원에나 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대에서 물리적으로 닿을 수 있는 학교에는 원하는 학과가 없었고, 이를 위해 부대 내에서 파견대로 옮겨가야 겨우 편도 두 시간 거리의 학교에 닿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초급부사관에게 있어서 주임원사라는 직책이 얼마나 멀게 느껴지는지는 군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주임원사님의 힘이 필요했고, 세 번 정도의 진심 어린 설득 끝에 겨우 파견대로 배치받는 것을 허가받았다. 조건은 파견대인원 두 명을 본대로 배치하고, 파견대로 혼자 배치받게 된다는 조건이었다. 업무적으로 힘들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고, 그렇게 파견대로 배치받아 남은 1년의 군생활 동안 대학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쉽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공학석사의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했고 나에게는 은인이었던 담당 교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논문까지 필수로 제출해야 했던 대학원 졸업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부대의 배려로, 주중에는 직장생활과 학교생활을 병행하며 대리운전으로 생활비를 조금씩 충당했고, 주말이면 비행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어느덧 전역의 해가 밝았고, 7년간 몸담았던 조직을 떠난다는 것의 부담은 전역이 코앞에 와서야 몸소 느껴질 만큼 성큼성큼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