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서기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도 7년간 20대를 모두 바쳤던 직장을 떠나면서 말이다.
선임들이 줄지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표정이 밝아 보이지 않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그냥 내 마음이 무거웠던 것일까..? 군생활동안 수없이 봐왔던 자리의 주인공이 내가 되었다. 그렇게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와 함께 회식은 1차에서 마무리되었다. 조촐했던 고별 회식과 함께 정확히 만 7년간의 군생활이 끝났다.
7년이란 세월은 짧지 않았다. 22살 어렸던 나는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사회로 환원(?) 되었다. 군 문화라는 것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꼭 필요한 기간이었음은 분명하다. 학력이며, 꿈을 이루기 위한 금전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내 전문분야에 적잖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지나고 나니 꼭 필요했으며 고마웠다고 생각되었다.
전역 후 당분간 소비만 있을 것이라는 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대학원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스케줄이 반영되는 대로 비행을 하기 위해 교육원을 들락거려야 했다. 정해진 시간에 얽매이는 알바나 직장을 구하기도 애매했다. 서른이 다 되어서야 사회로 나온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종종 우울감이 찾아왔지만 사실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가 전역한 이유는 비행교육에 매진하기 위해서였고 어떻게 해서든 교육원에서 교관이 되는 것이 나의 당면과제였다. 하지만 당시에 전무했던 부사관 출신의 교육생은 사실 비행교관 자원으로써 환영받을 인력은 아니었고 인정받기 위해 배로 노력해야만 했다. 일단 무작정 교육원 근처로 이사를 했다. 대학원과는 배로 멀어지지만-왕복 4시간 거리가 되었다- 일단 부딪혀야 했다. 얼굴을 많이 비추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나도 비행교관에 걸맞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받아야만 했기에..
그렇게 1년이란 시간 동안 열심히 두드렸다. 옷매무새 한번 틀어졌던 적 없을 정도로 온 신경을 곤두세워 집중했다. 결국 교육생 동기 2명과 함께 비행교관 과정에 입과 할 수 있게 되었다. 전역 후 1년 만에 다시 수입이라는 것이 생겼지만 국내에서 교관이 받는 ‘급여’라는 것은 겨우 나 하나 연명할 수 있는 수준이었고 돈보다는 비행시간을 쌓는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대학원생활과 비행교관 교육과정을 병행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밤낮으로 책상에 앉아있어야 했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논문심사와 교관면장비행 준비기간도 겹치게 되었다. 2019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바쁜 한 해를 보냈다. 하지만 결과는 직관적이었고 석사학위 취득과 비행교관으로 비행을 시작할 수 있는 자격을 거의 동시에 얻었다. 그렇게 나는 한발 더 다가갔다고 생각했다.
이후 비행생활은 순조로웠다. 그렇게 원하던 비행을 맘껏 할 수 있었고 작은 훈련기이지만 기장이 되어 학생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는 것은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꿈에 그리던 순간이었기에 비록 벌이는 시원찮고 위기의 순간도 종종 있었으나 항공사 입사 전 직업 만족도가 가장 높은 기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1-2년 교관으로서 비행 후에 항공사 입사를 목표로 했던 나의 계획은 노재팬과 함께 멀어져만 갔다. 노재팬으로 줄어든 일본 노선은 생각보다 항공업계에 큰 타격을 주었고 몇몇 LCC-저비용항공사-들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그렇게 노재팬은 조종사로서 취업을 준비하던 우리들에게 큰 악재로 다가왔고 그 여파가 다하기도 전에 이어진 코로나19가 결정타를 날렸다.
항공시장은 얼어붙었고 조종뿐 아니라 정비, 객실, 운송 등 모든 분야의 채용문이 닫혔다. 그렇게 갈 곳을 잃은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각자의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약 10개월가량을 배달알바를 하며 지냈다. 하지만 길어지는 팬데믹의 여파는 생각보다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이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순 없었다.
정말 써먹기 싫었던 카드를 꺼내어 들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 내가 이전의 직장인 헬기 정비사로 돌아와야 한다면.. 정말 불가항력에 의해 꿈이 좌절된다면 그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지 하고 남겨뒀던 카드를.. 회전익 정비 면장을 꺼내 들고 다시 취업문을 두드렸다. 사실 이마저도 3년 이상의 공백 이후에는 경력이 인정되지 않아 마음이 급했다. 다행히도 회전익 정비사 경력인지라 팬데믹의 여파를 많이 받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의 많은 관공서들이 헬리콥터를 운용하고 있었고, 군경력과 면장으로 해양경찰에 경력직으로 취업할 수 있었다.
12월에 입과했던 우리는 여수 해양경찰교육원의 칼바람을 맞으며 함께 운동장에서 열심히 굴렀다.. 동기들 중엔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몇 년 만에 꿈을 이룬 사람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만학도 형님 누님들, 법학과 출신이며 경찰학과 출신 등등.
해경 입사 후 마치 기득권이라도 된 것 마냥 다들 기뻐했다. 실로 교관들이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당신들의 미래는 이제 보장되었다고. 물론 나의 가족들도 많이 기뻐했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기뻐했던 거 같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해경 교육원 입교 후 한 달 정도는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렸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는 우울감보다, 다시 조종간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어느 날 무의미하게 휴대폰을 보다가 우연찮게 전 직장 부서장님의 카톡 프로필을 보았다.
“지금 여기가 시작이고 과정이며 결과이다. ‘지금 이 자리‘를 빼고 논하는 것은 망상일 뿐이다.”
머리를 세게 한대 얻어맞은 거 같았다. 마치 스스로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라며 허영심에 빠져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위 말처럼 모든 것이 ’ 과정‘이었고, ’ 지금 이 자리‘를 빼고 논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삶의 활력을 위해서라도 극복해야 했으며 이 모든 시간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자리’가 과정이 되어야만 했다.
이 날을 계기로 다시 일어섰고 약 1년의 교육기간 동안 상장 한 장 정도는 받고 수료할 수 있을 만큼 진심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