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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a Nov 18. 2022

나를 날게 하는, 일하게 하는

뉴욕 좋아하면 비행 오래 한다는 속설에 관하여


  승무원들 사이엔 이런 말이 있다.

“뉴욕 좋아하면 비행 오래 한다.”


  12년 전 어느 여름날. 교육 수료 후 신입 승무원으로서 첫 장거리 비행을 마친 나는 버스 창문에 머리를 쿵쿵 부딪히며 정신없이 졸고 있었다. 인천에서 뉴욕까지 14시간의 비행이 막 끝난 참이었다. 교통체증을 뚫고 호텔 셔틀버스가 우리를 내려 준 곳은 뉴욕 맨해튼 7번가 52번 스트릿. 눈도 못 뜬 채 버스에서 내린 나는 타임스퀘어 전광판의 화려한 불빛과 노란 택시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내가 뉴욕에 왔구나!”


  뉴욕 노선은 긴 비행시간, 항상 만석인 예약률, 그리고 수많은 상용고객들로 인해 부담이 큰 노선이라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하지만 나에게는 모든 취항지를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곳, 힘든 비행을 버티게 하는 힘이 바로 뉴욕이다. 아, 그만두긴 틀렸다.



  뉴욕의 사계절은 모두 다르고 저마다 아름답다. 나는 특히 뉴욕의 가을을 가장 사랑한다. 붉게 물든 가을날 허드슨강을 따라 클로이스터스 미술관까지 걸어가는 길은 그 자체로 가을 눈앞에 형상화한 것 같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발 끝으로 느끼며 걷고 또 걷는다.


  아침 일찍 커피를 사 들고 센트럴파크를 걷다가 뉴요커처럼 괜히 한번 달려보기도 하고 빽빽한 빌딩 숲 사이에서 보물찾기 하듯 작은 공원과 산책하는 강아지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훌륭한 미술관과 갤러리는 또 얼마나 많은지, 언제 가도 봐야 할 작품이 한가득이라 매번 전시 일정을 확인하며 설레곤 한다.


  12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삶은 일이 여행이고 여행이 곧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적당한 이방인으로서 뉴욕에 녹아들었다. 더 이상 지도를 보지 않아도 길을 찾을 수 있고, 수많은 일방통행 도로를 두리번거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건널 수 있을 정도. 지금 이 상태가 딱 좋다. 뉴요커로 살고 싶다는 꿈도 꿔봤지만 팍팍한 서울 살이를 생각하면 뉴욕에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 건물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도시 곳곳의 낡은 빌딩들은 오늘도 보수공사를 한다. 한결같은 모습을 간직하면서도 새로운 랜드마크가 생겨 스카이라인이 바뀌어 간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 아침의 베이글, 잔디밭에서의 낮잠, 한밤의 재즈바. 하루에 몇 번씩 다른 얼굴을 하지만 모두 내가 사랑하는 모습이다.



  동료들이 놀려 댈 때마다 손사래 쳤지만 이제는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뉴욕에 중독되어버린 승무원이고 절대 비행을 그만 두지 못할 것이란 걸. 입사 이래 처음 가져보는 긴 휴식기에도 매일 다시 뉴욕으로 돌아갈 날을 꿈꾼다. 덜컹거리는 가방과 함께 미소 띤 얼굴로 파란 스카프를 꼿꼿이 세우고, 첫사랑의 열병과도 같은 그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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