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창작자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곧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오랫동안 창작자를 동경해왔다. 그게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간에.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지' 못한 나는 오늘도 빈 종이를 마주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켜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업물을 둘러본다.
'도대체 남들은 뭘 어떻게 그리는 거야.'
공대와 항공사를 거치며 정해진대로 틀에 박힌 길만 걸어온 나는 창작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있던 '언젠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꿈틀거려 30대가 되어서야 취미 화실에 등록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초가 있지도, 없지도 않은 내게 누군가는 꽤나 잘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배운 적이 있냐고 하고 또 누군가(남편)은 그렇게 똑같이 그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다.
동생은 서양화를 전공했고, 남편은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들은 내게 "그림은 그냥 그리면 된다.", "배우려고 하지 말고 너만의 그림을 그려라." 따위의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평생 시키는 대로 공부하고 시키는 대로 일 해온 나는 그림도 누가 정확히 알려주어야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관련 전공을 하고도 저런 조언을 해주는 건 일종의 '가진 자의 여유'라고 생각했다.
취미 화실에서는 대체로 마음에 드는 그림을 유화나 아크릴로 모작하는 것을 가르쳤다. 남편에게 "또 똑같이 그리고 말았어요."라는 말과 함께 유치원생처럼 손에 든 그림을 내미는 순간 나는 어중간한 성적표를 받아 든 아이의 마음이 되고 만다. 이미 있는 것을 똑같이 그리지 말고 너의 그림을 그리라는 피드백에 난 또 한 번 더 작아졌다.
'모작이 그림 실력을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던데.', '작가들 대부분이 학창 시절엔 입시미술을 하고 대학에서는 정해진 그림을 그렸다던데.' 따위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아니 그럼 나는 방법이 없는 건가.'라는 절망을 지나 '안정된 삶에서 괜히 배가 불러 쓸데없이 일만 만드는 게 아닌가.', '과연 내가 살면서 끝까지 끈기 있게 해 낸 일은 과연 몇 개나 될까' 하는 자기반성과 자괴감으로 빠져들게 된다.
처음엔 취미 생활로 가볍게 시작했던 그림에 욕심이 나기 시작하고, 자주 절망하게 되면서 나도 미술을 제대로 배웠더라면, 미대에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들었다. (동생은 미술에 소질이 있어 미대에 갔지만 부모님은 나에게서 조금의 재능도 발견하지 못하셨다.) 제대로 시작해보지도 않은 일이 이렇게 나를 짓누르는 게 맞는 건가. 아무도 나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한 적이 없는데.
하지만 좋아하고 열망하는 일이 생업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도 생각해 본다. 생업은 살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기에 결국은 미워할 수밖에 없으니까. 나는 지금 얼마나 괜찮은 상황인지. 사랑하는 직업이 있고, 좋아하는 그림은 일과 관계없이 그냥 내 마음대로 그리면 되는 것 아닌가. 누가 강요한 것도, 정해진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 마음 가는 대로 내 속도로 그리면 될 뿐인 것을.
요즘은 집에서 혼자 그림을 그린다. 지금까지 유화만 해 와서 아크릴은 많이 낯설지만 강아지와 고양이에게 유화 기름 냄새가 안 좋을 것 같아 집에서는 아크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작가가 되어 유명해지고 싶다는 큰 꿈은 없지만 언젠가 조그마한 작업실을 갖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고 싶다.
오늘도 하얀 종이를 앞에 두고 커피만 축내며 한 시간을 보냈다. 일단 붓을 들고 손을 움직이자. 그냥 가다 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 거라 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