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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너스 Apr 18. 2023

피부과 의사에게 차이고 나서 깨달은 것들

YOLO에서 워크홀릭으로의 터닝 포인트. 전문직의 연애에 관한 에세이



살다 보면 문득 정신이 버쩍 드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는 이 일이 그런 순간이었다.

35살의 봄이었다.

오랜만에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만나는 사람 없으면 소개팅할 생각 있느냐는 연락이었다.

30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인생을 어떻게 살지에 대한 뚜렷한 방향이나 목표가 없던 시기였다.

당시에는 치과 개원 자리를 알아본다는 핑계로 주 2-3일 정도만 일했다. 남는 시간에는 아파트 단지 내 헬스장에서 적당히 운동을 하고,  적당한 임장( 개원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서)을 다녔다.

시간적 여유도 있고 적당히 생활비도 벌 수 있어서 삶이 행복했다. 당시에는 안분지족하며 사는 삶을 추구했었다. 조금 벌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삶의 방식이 나랑 잘 맞았다.


개원 자리를 알아보러 슬렁슬렁 다녔지만, 꼭 개원을 해서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은 안일한 생각도 있었다.

결혼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었다. 혼자서 적당히 벌면서 남는 시간에 여행 다니고 취미 활동하는 것이 삶의 낙이고 행복이었다. 나이는 35살이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20대 후반이고 싶었나 보다.


결혼에 대한 니즈가 없었기 때문에, 소개팅도 가벼운 마음으로 하던 시기였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이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지금은 어떤 생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이야기 듣는 것이 재미있었다. ​


이번에 소개받을 여성분은 30대 초반의 피부과를 전공한 의사였다. 작고 귀여운 외모의 여성분이었다.

여자 의사 선생님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나랑은 잘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이 여성분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의대에 입학을 하고, 또다시 치열하게 경쟁을 해서 의대를 우수하게 졸업해서 피부과를 전공했을 것이다. 경쟁, 치열함, 우수함 이런 것은 당시의 나에게 잘 와닿지 않는 키워드였다.


성격 좋고 외모도 좋은 여 의사분들은 소개팅 시장에 잘 나오지 않는다. 이미 의대 학부 때 수련의 때 제짝을 만나기 때문이다.  괜찮은 여자가 의대에 입학하면 주변에서 대시가 끊이지 않는다. 학부 동기들부터 학교 선배 수련의 선생님들까지 다양한 남자들이 대시를 한다.​


그런 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기대가 없었나 보다.

‘한창 좋을 나이에 피부과 선생님이 소개팅 시장에 나온 거 보면 별로겠지’

기대 없이 만나서 그랬는지 예상했던 것보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성격도 외모도 괜찮은 선생님이 왜 소개팅 시장에 나왔는지 의아했다.


전문직 남녀가 만났다고 해서 비싼 곳에서 데이트를 하는 건 아니다. 나는 첫날에는 모르는 여자와 같이 밥 먹는 게 불편해서 퇴근 후에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 그리고 첫만남에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야 하는데, 잘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돈 쓰는 것이 아깝기도 했다^^;)

차 한잔하면서 서로의 공통분모인 치대, 의대 학부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치대도 6년 의대도 6년 긴 시간의 학부를 보내는 공통점이 있다.

나도 그녀도 지방 소재 대학에서 학부를 보내다 보니, 자취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공감대를 형성했었다.


적당히 이야기하고 헤어지려는 찰나에

‘전화번호가 없는데 연락처 좀…‘

그녀가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카톡 아이디만 서로 있던 상태였다.

연락처를 달라고 하는 거 보니 그녀도 나와의 대화가 나쁘지 않았나 보다.​ 그 이후에 몇 번을 더 만났다.

몇 번 만나다 보니 나도 서서히 정이 들었다. 그때도 사실 나는 인생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치과의사를 그만두고 1년 동안 세계여행을 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다이빙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당시에 세계여행을 하려고 떠났는데, 이집트 다합이 너무 좋아서 다이빙을 하면서 물속 여행을 하는 게 너무 좋아서 다합에서만 1년을 지내다 왔다고 이야기했다.

​히피스러운 면이 많은 나에게는 그렇게 살던 시절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라,  신나서 여행 다이빙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서 그녀에게 차였다…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 호감이 있던 상태였는데도 말이다.

한 번은 한강에서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후추씨에게 호감이 있는데,

나중에 치과 하다가 갑자기 그만두고 세계여행 간다고 할까 봐 무섭다“

저는 이제 만나는 사람은 결혼을 염두에 두고 만나려고 하는데 그런 게 걱정된다.“

그녀가 말했다.


“ㅎㅎ 그런가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웃었는데, 그녀에게는 그게 진심으로 걱정되던 포인트였던 것이다.

당시에 나는 그녀의 생각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너무 정해진 대로 사는 것이 답답하다고 생각했었다. 치과의사만 하면서 평생을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한마디로 ‘아직 정신 못 차렸다’고 할 수 있다.


​그녀에게 차인 것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이전에는 여자를 만나면서 내가 차여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이고 나니 제일 먼저 드는 감정은 억울함 화남이었다.

‘너가 나를 찬다고?’

만나는 동안 정이 들었는지 감정의 동요가 일어났다.

‘내가 왜 차였지?’

당시에는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시에 나는 원하는 상대에게 거절당한 것이 화나고 억울했고, 그것을 나의 사회적 입지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훈훈한 외모의 치과의사였지만, 내실은 부실한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욜로족이었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도 없었고,  나이는 점점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치과의사로서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도 못했다. 개원을 해야 하는데 뭔가 내키지 않았다. 적당히 편하게 살고 싶은 욜로(YoLo)스러운 마음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젠 마냥 젊은 청년이 아니라는 것을 내심 알고는 있었다.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야 할 나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내가 돈이 없고 능력이 부족해서 그녀에게 차였구나’

라는 결론을 나는 내렸고, 그러고 나니 마음속에 방아쇠가 당겨진 기분이었다.

‘아 이제는 이렇게 욜로로 살면 안 되겠구나‘

’반드시 성공해서 저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야겠다‘

‘그리고 이집트 다합에서의 경험도 내 삶에 도움이 되는 경험으로 만들어봐야겠다’라는 다짐도 생겼다.


​​

우연한 계기에 우연한 소개팅 그리고 그녀에게 차이고 나니 현실감이 생겼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 수 있게 해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그녀의 심리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해가 간다.​


평범하디 평범한 우리 집안이 그녀에겐 성에 차지 않았을 것 같고, 나의 미래가 걱정됐을 것 같다. 나중에 주선자에게 들어보니 그녀는 집안 배경이 좋다고 했다.

집안 좋은 여자 의사선생님이 기대하는 배우자에 대한 니즈가 어떤 것인지도 나이가 좀 더 드니 알게 됐다.

30대 초반의 여성이 결혼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지를 이해하고 나니까  그 당시 그녀의 심리 상태도 이해가 갔다.


40살의 나는 그럼 어떻게 살고 있냐고?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하고 배려심 있는 아내와 살고 있다.

그럼 나는 지금도 욜로로 살고 있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워크홀릭으로 살고 있다.

주 80-100시간을 치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치과 개업의로 살고 있다.


주 6-7일을 일하고 있다. 1년에 휴가는 여름에 3일만 간다. 일요일 쉬는 날에도 치과 관련된 공부를 하기 위해서 세미나에 많이 참석을 한다.


40살의 내가 35살의 나를 바라보면 ‘정신 못 차렸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당시에 나를 알던 사람이 지금의 나를 보면 의아해 한다.  욜로와 워크홀릭 중에서 어떤 삶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워크홀릭으로 사는 게 불행하냐고?

그렇지 않다.

지금은 내 치과를 성장시키고, 나를 성장시키고, 미래를 위한 자본을 모으고, 여러 투자처에 투자를 하고…

이런 것들에서 재미를 느끼고 있다.  물론, 주3일 일하던 시절이 그리고 욜로처럼 세계여행하며 떠돌던 시절이 문득 그립다.


하지만, 다시 그렇게 살라고 하면?

지금은 못 할 것 같다.

사람이 다 때가 있나 보다.​

지금은 일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내 힘으로 더 이루고 싶다. 그 성공이 내가 생각하는 임계치가 넘는 시기가 오면,  이번에는 욜로 와 워크홀릭 중간 어딘가의 삶을 선택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

ps. 그리고 덧붙이면, 사람의 인연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지금 내 정신상태와 경제적 상태로  피부과 그녀를 만났으면 만남이 잘 됐겠지만,  결혼 이후에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전문직이라는 것 사회적 능력이 좋다는 것이 나에게는 배우자의 중요한 덕목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에게 잘 어울리는 배우자는 배려심 있고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될 성격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예쁜 외모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항이다:)

그런 아내를 만날 수 있던 것이 큰 행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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