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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탄 Sep 19. 2019

우리집 마당에 보물이 있었다니

오늘의 행인1 : 고물 줍는 할머니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떠지지도 않는 눈을 찡그려가며 들여다본 휴대폰 화면에는 ‘7,0,5’라는 숫자가 나열돼 있다. 말도 안 된다. 7시 5분이라니. 남들보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나에겐 아직 한창 새벽인 시간이다. 대체 이 시간에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저자는 누구란 말인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이불을 뒤집어쓰는데, 다시 소리가 들린다.
 
‘쾅쾅!! 쾅쾅쾅쾅쾅쾅!!’
 
하. 짜증나. 다시는 이 집 문을 두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밖에서도 들리도록 최대한 쿵쾅거리며 걸어가 문을 열었다.
 
“아이고! 있었네~”
 

거기엔 나를 너무나 반가워하는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반가움이 지나쳐서 순간 아는 분인가도 싶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나오지 않았다면 문을 더 두드리려 했는지 할머니는 여전히 주먹을 쥐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땀을 닦을 손수건이 들려 있고, 머리는 반쯤 희끗하게 세었는데 따로 염색을 하시는 것 같진 않았다. 딱히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손녀 보듯 너무 환한 웃음을 지으시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공손히 미간의 주름을 풀었다.
할머니도 방금 막 이불에서 기어 나온 내 몰골을 눈치채고는 자고 있었나 보다고 미안해하며 빠르게 용건을 꺼냈다.
 
“아니, 이 집 마당에 며칠째 서랍이 있길래. 저거 버리는 거면 좀 가져가도 되나 해서요.”
 
그래. 엊그제인가 그 전날인가부터 마당에 작은 서랍 같은 게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저런 건 버리려면 폐기물 신고를 해야 할 테니 잠깐 놔둔 거겠거니 생각했었다. 다만 뭘 저렇게 마당 한가운데 뒀는지는 좀 불만이었지. 이 집 마당을 공유하는 가구 수는 모두 5개. 우리 집은 아니었으므로, 나머지  중 하나가 내놓았을 것이다.
문을 더 열고 밖으로 나와 마당을 내다봤다. 서랍은 계속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 옆엔 폐지 같은 게 켜켜이 눕혀진 리어카가 보였다. 할머니는 폐지와 고물을 주워다가 파는 일을 하시는 것 같았다.

어차피 버리는 거면 할머니가 가져가는 게 여러모로 좋겠으나, 어쨌든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버리는 건지 (그럴 리는 없어 보였지만) 쓰는 건데 잠시 내놓은 건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우리 집 것이 아니라고 하자 할머니는 무거운 한숨을 푹 쉬셨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집 말고 다른 집 사람들에게도 물어봤는데, 아무도 자기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거였다. 그럴 리가? 그럼 저걸 누가 저기다 가져다 놓은 걸까.
 
“이거 팔면 얼마나 하려나? 폐지보다는 더 주지 않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이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거든. 이런 물건은 처음이라 가늠이 안 되네... 아유, 근데 주인을 알 수가 없으니 어째.”
 
서랍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이 빈 섬에서 보물을 발견한 해적처럼 빛났다. 나를 세워두고 잠시 동안 하소연을 하던 할머니는, 그녀의 보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리어카를 끌고 골목을 걸어 나갔다. 걸어가면서도 집집이 담 앞에 내놓은 다른 보물은 없는지 매의 눈으로 살폈다. 

주인에게 허락받지 못해 보물을 가져가지 못하는 해적이라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가 싶더니, 내 눈에도 서서히 저기 서있는 서랍이 보물처럼 보이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서랍은 여전히 마당에 놓여있었다. 그동안 비도 맞았으니 버릴 생각이 아니었다 해도 이제 만들어졌을 때의 목적대로는 못 쓰는 물건이다. 그런데도 아주 탐스러운 자태였다.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저 보물, 주인 없는 것 같아요, 할머니. 그냥 가져가세요!!






<101개의 얼굴에 대한 보고서>

매일 옷깃 스쳐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사소한 기록입니다.

낯선 얼굴들이 건네는 안 낯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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