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ffee or tea?"
기체가 난기류를 만나 출렁여도 내 상체는 절대 흔들림이 없다. 3만 피트 상공, 좁고 긴 복도(Aisle) 위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승객의 컵에 온기를 채운다.
잘 다려진 유니폼 위로 한 방울의 긴장도 비치지 않는다. 이곳은 내가 완벽하게 통제해야 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얇은 커튼 하나를 젖히고 갤리(Galley)로 들어서는 순간 무대 조명은 꺼지고 처절한 백스테이지의 막이 오른다.
갤리는 차갑고 단단한 철제의 세계다.
좁은 공간에 꽉 들어찬 오븐과 각종 카트들은 하나같이 날이 서 있다.
A380, 500명가량의 승객에게 서비스를 하는 그 시간은 초 단위의 전쟁이다.
커튼 안의 공기는 탁하고 뜨겁다.
복도에서의 정중한 대화 대신 갤리 안에서는 숨 가쁜 외침과 금속들이 부딪치는 파열음만 가득하다.
땀방울이 턱 끝까지 맺히지만 커튼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나는 다시 흐트러짐 없는 승무원이 되어야 한다.
뜨겁게 달궈진 오븐에서 식사를 꺼내다 손과 팔을 데이는 건 예삿일이다. '치익-' 하고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기내 엔진 소음에 맥없이 묻힌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오지만 찬물에 손을 담글 여유조차 없다.
급한 대로 얼음 컵 하나에 손등을 대고 열기를 식히며 다음 서비스를 준비할 뿐이다.
전쟁 같은 비행을 마치고 돌아와 샤워를 할 때면 나는 뒤늦게 내 몸의 비명을 마주한다.
샤워기의 뜨거운 물이 닿을 때서야 따끔거리는 화상 자국과 나도 모르게 여기저기 부딪혀 남겨진 시퍼런 멍을 느낀다.
아일 위를 바쁘게 뛰어다닐 때는 미처 몰랐던, 신기하리만큼 기내에서는 아프지 않았던 흔적들이 몸 구석구석에 훈장처럼 남겨져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화상 외과에서 드레싱을 받으며 깨달았다.
기내에서 건넸던 나의 미소는 사실 이 붉은 흉터들을 담보로 피워낸 꽃이었다는 것을.
갤리 안에서 무릎을 찧고, 철제 모서리에 긁혀 스타킹이 나가는 일상적인 사고들은 내가 내 구역을 지켜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냈다는 증거였다.
문득 병원을 나서는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살핀다. 넥타이를 고쳐 매는 직장인의 손목에도,
무거운 가방을 든 학생의 어깨에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각자의 일터에서 얻은 마음의 화상 자국이 하나씩은 남겨져 있을 것만 같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얇은 커튼을 마음속에 걸어둔 채 살아가는 전우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몸의 흉터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엉망진창이 된 속마음과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감추고 다시 세상이라는 무대 위로 나설 준비를 하는 모든 이들은 아름답다.
나는 오늘도 빨갛게 부어오른 손등에 연고를 바르는 대신 입술에 단정한 립글로스를 덧바른다.
거울 속의 흉터는 가려지지 않지만 그 위에 얹어진 미소만큼은 아름답도록.
다시 깊은숨을 고르며 커튼을 젖힌다.
이 커튼 너머에는 각자의 전쟁터에서 받은 작은 상처를 마음 한편에 묻어둔 채 여행을 떠나온 이들이, 혹은 치열한 출장길 위에서 간신히 잠시 눈을 붙이고 있을 나의 수많은 전우들이 있다.
내가 먼저 건네는 다정한 인사가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닦아주는 작은 연고가 되길 바라며 나는 기꺼이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