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드르륵”
적막한 호텔 복도에 내 캐리어 바퀴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비행을 마치고 호텔 방 문을 여는 순간, 승무원으로서의 스위치는 꺼진다.
유니폼을 벗어던지기도 전에 캐리어 지퍼부터 가르면 도라에몽 주머니 같은 지급품 가방에서 압축된 짐들이 쏟아져 나온다.
남들이 보면 피난민 짐 보따리라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낯선 타국에서 나를 지켜줄 최소한의 방어선이다.
본격적으로 짐을 풀기 전 거쳐야 할 엄숙한 의식이 있다.
바로 '베드버그 퇴치 의식'
5성급 호텔이라도 방심은 금물이다.
파우치에서 비장의 무기인 계피 추출액 방향제를 꺼내 침대 귀퉁이에 분무질을 한다.
은은한 계피향이 방 안 가득 퍼져야 비로소 안정감이 들고 그제야 본격적으로 짐을 풀어본다.
가장 먼저 꺼내는 건 멀티탭이다.
US, UK, EU… 전 세계를 비행하다 보면 나라마다 제각각인 플러그 모양 앞에 가끔 당황하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무적의 어댑터와 멀티탭이 있다. 침대 머리맡 콘센트에 각 나라의 규격에 맞는 플러그를 찾아 멀티탭을 맞춰 아이패드, 업무용 탭, 핸드폰, 에어팟까지 줄줄이 연결하는 순간 전투 준비를 마친 병사처럼 마음이 더없이 든든해진다. 이 좁은 호텔 방 안에서 내가 사용할 모든 문명의 물건들이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다.
그 후 꺼내든 건 승무원들의 생존 아이템인 전기장판.
찌는 듯한 더위와 눅눅한 습기를 잡으려 밤새 돌아가는 에어컨 탓에 북극 냉기가 감도는 동남아 호텔, 뼈가 시릴 듯한 추위에 난방기를 틀면 얼굴이 찢어질 것만 같은 유럽 호텔에서 이것은 필수다.
작게 접힌 전기장판은 단순한 가전제품을 넘어서 세계 어느 호텔이든 순식간에 뜨끈한 온돌방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양탄자이자 한국인의 정서 그 자체이다.
나는 서둘러 장판을 이불속에 넣고 온도를 높인다.
차가운 이불속이 뜨끈하게 데워지는 동안 온몸에 묻은 비행기 먼지를 털어내려 화장실로 향한다.
세면대 위에는 100ml라는 보안 규정이 낳은 집념의 물건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는다.
샴푸, 린스, 바디로션부터 클렌징 오일과 헤어에센스까지.
라벨링까지 완벽히 된 작은 공병에 옮겨 담긴 액체들이 정갈하게 줄을 맞춰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나만의 'K-편의점'이 열린다.
각 나라의 검역 기준에 맞춰 챙겨 온 각종 컵라면들.
얼큰한 국물 라면부터 컵밥까지, 그날의 기분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작은 메뉴판이다.
나름대로 관리하는 승무원의 양심은 살아있어 다음 날 아침용으로 챙겨 온 여러 가지 맛의 단백질 쉐이크 파우치들이 라면 옆에 나란히 줄을 선다.
밤에는 나의 최애 라면인 육개장 사발면, 아침엔 미숫가루맛 쉐이크. 이보다 더 완벽한 단짠의 조합은 없다.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이제는 데워 놓은 이불속으로 다이빙할 시간! 얼굴에 콜라겐 마스크팩을 하나 붙이고 뜨끈한 장판 위에 등을 지지며 나름의 사치 아이템인 다리 마사지기를 채우는 순간, 열몇 시간의 치열했던 비행은 눈 녹듯 기억 한편에 묻힌다.
퉁퉁 부은 종아리를 꽉 조여 오는 압박감과 등 뒤로 전해지는 온기. 이 소박하고도 거창한 순간을 위해 나는 그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국경을 넘었나 보다.
오늘도 나는 집을 통째로 끌고 하늘을 건넜다. 이 무거운 애착 아이템들이 캐리어 안에 꽉 차 있는 한,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나는 익숙한 나의 집으로 퇴근한다.
몇 시간 뒤면 이 수많은 짐을 다시 작은 캐리어에 구겨 넣어야 하는 '테트리스의 시간'이 온다는 걸 나는 애써 외면하며 잠이 든다.
아 다음 비행엔 진짜 미니멀하게 올 거야!
물론, 완벽한 거짓말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