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한국.
아침 공기는 칼날처럼 뺨을 스치고 거리의 사람들은 두툼한 목도리와 패딩으로 자신을 겹겹이 봉인하는 계절.
휴대전화 달력에 선명히 박힌 크리스마스와 연말이라는 단어는 흰 눈, 따뜻한 코코아, 한 해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아쉬움과 설렘을 떠올리게 한다.
거리 곳곳에 서있는 트리와 캐럴은 누구나 아는 한국 겨울의 풍경이다.
추위를 싫어하는 내게는 작은 탈출구가 하나 있다.
인천공항의 차가운 공기를 지나 열 시간 남짓을 날아 도착한 곳은 지구 반대편의 도시 시드니.
문이 열리자마자 후끈한 공기가 밀려왔다.
그렇게 나의 계절은 단번에 바뀌었다.
사람들은 반팔과 짧은 바지 차림이었고 햇빛은 아낌없이 쏟아져 내렸다. 시드니 하버 근처를 걷는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다. 한국에서라면 눈 덮인 산을 상상해야 할 시기에 나는 눈부신 코발트색 바다와 부서지는 파도와 황금빛 모래사장을 보고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 앞 테라스에는 손에 맥주잔을 든 채 그저 햇빛 좋은 오후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얀 조개껍질 같은 오페라 하우스는 묵묵히 그 뒤에 서 있었고 그 앞에서는 한여름의 일상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특히 본다이 비치(Bondi Beach)에서 계절의 대비는 극명했다. 사람들은 두꺼운 패딩 대신 수영복을 입고 뜨거운 햇살을 피하려 선글라스를 낀 채 야자수 그늘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귓가에 들리는 것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아니라 경쾌한 파도 소리였고 손에 들린 것은 뜨거운 붕어빵이 아니라 시원한 아이스커피였다.
한국의 12월이 웅크림과 쉼의 계절이라면 시드니의 12월은 생동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사람들은 서핑을 즐기고 잔디밭에 누워 일광욕을 하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서울의 겨울 풍경을 떠올렸다. 입김이 하얗게 번지던 아침, 포장마차의 오뎅 국물, 그리고 두 손을 비비며 걷던 퇴근길.
잠시 후 다시 눈을 뜨자 펼쳐진 것은 태양의 에너지가 넘실대는 남반구의 여름이었다. 같은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두 계절이 내 몸속에서 충돌하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이곳의 크리스마스는 산타가 썰매가 아닌 서프보드를 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로망은 없지만 태양의 열기로 가득 찬 이색적인 썸머 크리스마스가 있었다.
나는 두 계절의 기억을 모두 가진 채 계절을 역행하는 이 도시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움을 느꼈다. 어쩌면 여행이란 이렇게 익숙한 계절의 질서를 깨고 나만 다른 계절을 살아보는 낯선 경험을 통해 일상을 환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승무원이라는 직업은 나에게 이런 특권을 준다.
계절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순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특권. 한국의 겨울이 가장 깊어질 때 남반구의 여름에 발을 들이는 일.
눈 대신 햇빛을, 붕어빵 대신 피시 앤 칩스를 먹는 기분.
나는 여름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또다시 겨울로 돌아갈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이 햇살이 더 선명하고 이 바다가 더 소중하다. 잠깐 빌려온 계절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더 천천히 걷고 오래 바라본다.
어쩌면 승무원으로 산다는 건 계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짧은 순간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다른 계절을 기억하며 다시 비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