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 종횡사해
해마다 4월이 되면 2003년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우리들 곁을 떠났던 장국영을 추모하며 케이블이나 종편 등에서 그의 출연작들을 방영해 준다. 그중 그림이 나오는 영화도 있는데, <종횡사해>(오우삼 감독, 1991)가 그것이다. 미술품을 전문적으로 훔치는 범죄 액션영화이니 그림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제목의 종횡사해란 세계를 누비며 활약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는 두 점의 그림이 중요하게 등장하는데, 각각 영화 스토리의 두 중심 구도를 매개한다.
명화와 골동품을 전문적으로 훔치는 아해(주윤발 분)와 홍두(종초홍 분), 제임스(장국영 분)는 사부의 지휘 아래 환상의 호흡을 자랑한다. 이들이 영화 도입부에서 처음으로 훔치는 그림은 모딜리아니의 <노란 스웨터를 입은 잔 에뷔테른> 이다. 프랑스 파리의 박물관에서 니스로 옮겨지는 그림을 운송중인 트럭에 잠입하여 훔치는 과정이 나름 박진감 있게 전개된다. 이들이 다음으로 훔치는 그림은 폴 데지레 트루이베르의 <하렘의 여시종>이다. 국제경찰의 추적을 피하던 이들은 도난당한 이 명화를 다시 훔쳐 달라는 프랑스 갱단의 주문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이 역시 성공시킨다.
먼저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미술사에서 전설적인 사랑을 나눈 아내 잔 에뷔테른을 그린 것으로, 영화에 등장하는 러브 코드를 암시한다. 즉, 아해와 홍두, 제임스 사이의 사랑과 우정을 상징한다. 홍두는 아해의 애인이다. 하지만 제임스 역시 홍두를 사랑한다. 일종의 삼각관계인 셈이다. 아해는 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은 하지만 구속하고 구속받는 것은 싫어한다. 아해 역의 주윤발이 그림을 훔치는 와중에 제임스 역의 장국영에게 하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꽃이 예쁘다고 꼭 꺾어야 되는 건 아니잖아"
영화 초반부에서 아해와 제임스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훔치기 위해 달리는 트럭으로 각자 잠입해 들어가는 모습은 홍두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각기 분투하는 것을 상징하는 듯이 그려진다. 영화의 결말에서 이들 간의 사랑은 모딜리아니와 에뷔테른처럼 극단적으로 비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엇갈림 속에서 애잔한 슬픔을 보여준다. 인물들 눈동자가 그림처럼 비어있는 것이 모딜리아니 그림의 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아해와 제임스 사이에서 어느 한 곳으로 눈동자의 초점을 맞출 수 없는 홍두의 입장을 대신하는 것 같게도 보인다.
다음으로 폴 데지레 트루이베르의 <하렘의 여시종>은 영화의 다른 모티프인 복수 코드를 상징한다. 이들 아해와 홍두, 제임스는 고아 출신으로 양아버지 사부의 손에서 범죄를 배우며 양육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범죄조직의 두목인 사부에게서 못벗어나고 그의 손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림의 여시종은 이같은 그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하렘의 여시종>을 훔치는 과정에서 사부는 프랑스 갱단에게 아해의 살해를 사주하기도 하는데, 나중에 이를 알고 이들은 복수를 꾀한다. 그 과정에서 그림을 뺏으려는 싸움이 전개되는데 여기에서 이들이 그림을 불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주인과 시종 관계의 청산을 의미하는 상징행위로 해석된다. 영화에서는 <하렘의 여시종> 그림의 원본이 다 나오지는 않고 이중 인물 부분만 크게 그린 그림이 나온다.
홍콩 느와르 영화답게 총알이 화면 가득 난무하면서도 코믹한 장면들이 사이사이 섞이면서 영화는 결코 관객들을 심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특히 포스터로도 나오는 이들 남녀의 낭만적인 드라이브 장면이나 정장을 빼입고 춤을 추는 장면은 청춘 로맨스 영화 뺨칠 정도이다. 범죄 복수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래서 이들의 복수는 유쾌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