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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Dec 04. 2016

[도서]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추억의 만화를 통해 건네는 위로와 격려


어릴 때 무심히 보던 만화들이지만 지금 다시 보면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다. 초등학생 시절에는 '빨강머리 앤'이 그저 한없이 긍정적이며 공상을 좋아하는 아이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앤의 말에 귀 기울여 보면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따로 있었구나 싶다. 

이 책은 소설가 백영옥이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대사들과 내용을 통해 지금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는 에세이다. 작가는 '살다 보니 앤이 말한 것 중에 틀린 부분도 있었고 맞는 부분도 있었다'라고 하며 스스로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H가 언젠가 지나가듯 내게 말했었다. 행복은 지속적인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행복해지는 방법은 ‘큰 행복’이 아니라 ‘작은 행복’을 ‘자주’ 느끼는 것이라고.

'곰돌이 푸'에 나온 대사 중에 '매일 행복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행복한 삶을 목표로 두고 그를 위해서 지금은 고생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마냥 행복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꿈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이후의 삶을 살아내며 매번 행복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지속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불행을 느낄 때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니라며 끊임없이 행복한 삶을 바라게 되고 정작 지금 옆에 있는 즐거움을 놓치게 된다. 어떤 대단한 행복을 기다리기보다 소소한 일상에서 오는 즐거움을 찾는 일이 더 빠르고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한때, 미인이 되는 건 예쁜 꽃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기왕이면 장미나 튤립처럼 우아하고 청초한 꽃 말이다. 하지만 이젠 아름다움이 그렇게 완성되는 게 아니란 걸 안다. 어떤 꽃이 되느냐는 사실 생각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들어 빠진 장미나 말라버린 튤립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중요한 건 할미꽃이든 호박꽃이든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어떤 꽃은 4월에 피고, 어떤 꽃은 9월에 피어난다. 잎이 피고 꽃이 피는 철쭉도 있고, 꽃이 먼저 피고 잎이 피는 진달래도 있다. 심지어 비슷해 보이는 철쭉과 진달래조차 그것이 피고 지는 순서가 다른 것이다. 우리 또한 그런 게 아닐까. 내가 어떤 꽃인지 아는 게 중요하고, 활짝 피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소중한 것이다.

눈을 내면이 아닌 외부로 돌리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조급함을 느끼기 쉽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뛰어드는 일을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고 착각하여 그에 몰두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해서 좋아 보이는 일이 자신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그 반대되는 일이 자신의 길일 수 있다. 어떤 것이든지 간에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언제 이루어 내는가 보다 어떻게 해나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삶은 장기간의 레이스이기 때문이다.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잘 안 되는 거다. 중요한 건 실수를 자기 몫으로 감당해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 사람만 하는 특이한 실수가 그 사람의 캐릭터가 되기도 하니까. 못하는 걸 잘하려고 자책하며 노력하는 일보다, 잘하는 걸 조금 더 잘할 수 있게 정성을 쏟는 일이 어쩌면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학교에 다닐 때 나에게 가장 고통을 안겨 준 건 수학이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성적이 현저히 낮아서 단과학원을 등록한 뒤 공부를 하고 시험 때는 그 과목에 온 집중을 쏟아부어야 남들 만큼의 점수를 받았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곧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내가 참 못나보였다. 그래서 수학 과목에 엄청난 노력을 들였고 아이러니하게 대학에서도 수학이 필요한 분야를 전공하며 고통을 이어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왜 못하는 과목에 그리 치중하며 시간을 허비했을까 싶다.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지만 만약 시간을 다시 되돌린다면 거기에 그렇게 자책하며 노력을 쏟아붓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하고 잘하는 부분을 살리기 위해 그만큼의 집중을 했으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었을 것 같다. 




무엇을 원한다는 건 그것에 따른 고통도 함께 원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꿈을 이루기 위한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모델 같은 몸매를 위해 흘렸던 땀과 허기는 마침내 거울 속의 모습으로 보상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스러웠던 다이어트를 다시 한번 더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 역시 글을 읽은 후 보내는 독자들의 따뜻한 메일이나 격려로 그 힘든 마감을 매번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꿈을 이룬다는 건 그런 뜻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망설이는 이유는 그 결정으로 지불해야 하는 몫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의 결과가 지금의 우리이며,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몫이다. 소설가 김훈이 말했다.
“물고기가 낚시 바늘을 물지 않고 낚싯밥을 먹을 수는 없다.” 
모든 선택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이 선택의 본질이다.

어느 교수님이 '교수가 되면 다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약간에 불과하고 그 외에 귀찮고 싫은 일들이 더 많아요.'라는 말을 했다. 그처럼 어떤 일이라도 반드시 좋은 면만 있을 수는 없다. 꿈을 꿀 때 원하는 부분 만을 바라본 사람과 그 이면을 알면서도 감수해야겠다는 각오를 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긍정적인 부분만 생각한 사람은 고통이 따를 때 그만큼 견뎌낼 힘을 얻지 못하고 그 꿈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빨리 찾아온다. 하지만 숱한 고통이 따를 것을 예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야겠다는 사람은 조금 더 신중하게 선택하고 더 길게 노력할 수 있다. 




2년 전, (세월호) 사고가 난 후 횡단보도에 서 있는 아이를 본 적이 있다. 별생각 없이 길을 건너려다 아이가 차를 향해 번쩍 손을 드는 걸 봤다. 아이는 저 동작을 엄마에게 배우고, 유치원에서 익혔을 것이다. 저 작은 아이는 손을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달려오는 어떤 차도 자신을 향해 돌진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이 하나를 어른으로 만들기 위해 그렇게 교육시킨다. 아이는 씩씩하게 횡단보도를 걸어갔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아이들도 그랬을 것이다. 안내 방송을 듣고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갑판 위로 올라가야겠단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배운 대로의 원칙을 지켰다는 이유로 많은 아이들이 차가운 물속에 잠겼다.

인간이 겪는 가장 끔찍한 고통은 무엇일까. 평소와 다르지 않은 보통의 날,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게 되는 일일 거다. 세월호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가족들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때, 시간은 멈춰버린다.

지하철 안에서 이 부분을 읽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아 당황스러웠다. 만약 내가 고등학생일 때 세월호 사건과 같은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배 안에서 구조를 기다렸을 것이다. 어른의 말을 잘 듣는 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었다. 배운 대로 하지 않고 안내 방송을 거슬렀어야 했다. 아이들에게 원칙을 따라야 한다고 교육시키는 것은 어른인데, 정작 그러한 어른이 믿음을 주지 못했다. 나도 나이로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지만 가끔 앞으로 어떠한 어른이 되어야 할까에 대해 고민하고는 한다. 아이들에게 어떤 것이 옳은지 말해주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며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다.

세월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목소리를 높일 때 '이제 그만 지겨우니 되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가끔씩 떠올리고 가슴 아파하는 것에서 그치지만 유가족에게 그 일은 생활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니면 잠자리에 들어서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의 슬픔일 것이다. 그런데 유가족 외의 사람들이 과연 '지겹다'며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있을까. 




슬픔을 슬픔 의외의 것으로 뒤섞지 말아야 한다. 슬픔을 분노로 바꿔 왜곡시키면 스스로 애도의 시간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외로움을 배고픔으로 착각해 폭식하거나, 우울을 우울의 증상인 단순한 수면장애로 오해해 방치하면, 우리는 점점 더 깊이 병든다. 슬픔은 제대로 다뤄졌을 때에만 시간과 함께 자연스레 사라진다. 자기 안에 있는 감정들을 분리해 다독인다는 건, 나 자신을 아끼고 돌보는 행위이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일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만한 일이 아닌 것에 지나치게 화가 나거나 슬플 때 시간을 가지고 잠시 그 원인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면 그 일 자체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 다른 문제 때문에 생긴 감정이 억눌려있다가 엉뚱한 부분에서 튀어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해도 내 감정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에서 꽤 많은 위로를 얻는다.




나는 이제 ‘절대’ 라거나 ‘결코’라는 말을 쓰는 사람을 잘 믿지 않게 되었다. 절대,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 같은 건 없으니까. 그럴 수도, 이럴 수도 있는 게 인생이었다.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간신히 이해한 삶이다.

심리학자 야노프-불먼(Janoff-Bulman)은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뒤 불안감이 지속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원인을 '자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일을 경험하며 안정감이 흐트러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만 벌어질거라 생각했던 큰 사건을 경험하며 혼란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일어날 가능성이 낮은 일은 있어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은 없다. 나쁜 일도 그렇지만 좋은 일도 그렇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불행한 일을 겪지 않는다고 해서 오만할 이유도, 행복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할 이유도 없다.




연애에 있어 가장 좋은 상대는 어떤 사람일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는 비슷한 듯 다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서,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사람이 좋다. 함께 있을 때 마냥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지 않아도 좋은 사람. 조금 더 정확히 말해, 함께 있지 않음이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은 사람이 내겐 최고의 상대다.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이라는 책에서 "먼길을 돌아 결국 내가 선택한 사람은 굳이 함께 있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남자"라는 글을 읽었다. 나보다 더 많은 삶을 산 두 사람이 내게 비슷한 조언을 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에 대해 생각해보니 아마도 '나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매일 같이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시시각각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하는 관계는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오래 함께하기에는 어렵다. 각자 나름대로의 생활을 하면서 잠시 떨어져 있더라도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어야 서로의 삶 속에 녹아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작가가 되었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답한다. 아마 다음번 월드컵 때, 나는 골을 넣으며 환호하는 선수보다 상대편 골키퍼나 선수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될 거라고. 악전고투 끝에 내가 작가가 된 건 그런 삶의 이면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기쁨보다 슬픔에, 성공보다 실패에 먼저 접속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어쩌면 별 쓸모없는 능력 말이다.

누군가의 성공 뒤엔 누군가의 실패가 있고, 누군가의 웃음 뒤엔 다른 사람의 눈물이 있다. 하지만 인생에 실패란 없다. 그것에서 배우기만 한다면 정말 그렇다. 성공의 관점에서 보면 실패이지만, 성장의 관점에서 보면 성공인 실패도 있다. 나는 이제 거창한 미래의 목표는 세우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란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작고 소박한 하루하루,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나. 오늘도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글을 쓴다. 조금씩, 한 발짝씩, 꾸준히…

'앞으로 10년 후의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맞추어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저 사람은 지금까지 계획을 세운대로 다 잘 되어왔나 보다 싶어서다.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웠어도 그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자책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보면 목표에서 벗어나길 잘했다고 여겨지는 일들도 있다. 당장 하루 앞의 일도 내다볼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꿈에 충실하며 조금씩 성장하기 위해 매일 꾸준한 노력을 해나가려 한다.




일본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오토바이 사고로 죽음 직전까지 간 이후, 이렇게 말했다.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을 가장 열심히 살아간다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은 정확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장 진지한 성찰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서 삶의 마지막이 어떻게 찾아올지 알 수가 없고 나이가 적다고 해서 반드시 앞날이 오래 남아있는건 아니라는걸 알았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는 건 비관적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한 편으로는 앞으로의 생에 충실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삶이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감정에 더 솔직해지고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수 있다. 




전요. 뭔가를 즐겁게 기다리는 것에 그 즐거움의 절반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즐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즐거움을 기다리는 동안의 기쁨이란 틀림없이 나만의 것이니까요.


학창 시절 시험기간 동안 가장 행복한 날은 시험이 끝나는 날이 아니라 그 하루 전 날이었다. 시험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을 적어두고 내일 반드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시험이 끝나고 버킷리스트와도 같았던 일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즐겁지 않을 때도 있었고 나중에는 허무함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와 비슷하게, 꼭 보고 싶던 공연을 예매해두고 기다린 끝에 관람하고 나면 왠지 모를 공허함을 경험한 적도 있다. 시험이 끝나고 나서 할 일들, 좋아하는 공연 관람에 대한 즐거움도 있었지만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오는 즐거움이 꽤 컸다. 기다림의 끝에 즐거움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동안 기쁨을 맛볼 수 있다니 기다림은 그 자체로 참 소중한 것이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잘랄루딘 루미


기다림에 대해 생각하다가 떠오른 시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나는 이 시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무언가를 준비하는 설렘'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이 온다면 무엇을 준비했는지는 의미가 없어지지만 그동안의 마음만큼은 나의 것으로 남는다.




만화 '빨강머리 앤'을 본 지 꽤 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던 대사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더 많지만 이 글에 모두 담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읽으면서 많은 공감을 했고 나보다 더 오랜 삶을 산 선배에게서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아가는 방법과 긍정적으로 삶을 바라보는 자세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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