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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Jun 13. 2018

[영화] 허스토리 (HerStory)

역사가 아닌 지금, 그녀들의 이야기

영화 '허스토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이전에도 '귀향'이나 '아이캔스피크'와 같은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았는데, 그때마다 눈물이 났다. 이번 역시 그렇겠구나 하는 마음에 아예 옆에 휴지를 준비해두고 관람했지만 의외로 울지 않았다. 피해사실을 알리는 당당한 할머니들의 모습에 가슴은 뭉클해졌고 머리는 차가워졌다.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약 6년간 진행된 관부재판 실화를 소재로 했다. 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를 입은 할머니 1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며 23번의 재판을 치렀다. 시모노세키의 지명 '하관'과 '부산'을 줄여 관부재판이라 불렀다고 한다. 부산의 여성경제인연합회가 이 재판에 힘을 실어주었는데, 배우 김희애가 연합회의 리더역을 맡았다.

재판 결과는 부분적인 승소였다. 위안부 피해자의 경우 인권 침해가 인정되어 일인당 30만 엔(약 300만 원)을 지급하고,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경우 피해사실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으나 금전적인 보상을 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인 사과를 할 의무는 없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아주 개운한 승소는 아니지만 일본 측에서 가해 내용과 인권 침해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항소로 2001년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일본에게는 배상의 의무 또한 없다'는 내용의 판결이 나왔다. 그리고 2003년,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하였다. 영화에서는 부분적으로 승소를 거둔 1심 재판을 다룬다.






이렇게 재판을 다루는 영화이다 보니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상적이 되기보다 어떻게 하면 피해사실을 명백히 밝혀 승소로 이끌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두게 된다. 다른 영화에서는 관객이 위안부 피해 현장에 있는 것처럼 당시 상황을 재현하여 보여줌으로써 가슴을 울리게 하는 반면, '허스토리'는 철저히 위안부 할머니들이 증언하는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현재 우리의 상황과 가장 가깝다. 당시의 사건을 직접 볼 수 없으며 명확한 증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일본은 언제든지 다양한 논리를 펼쳐서 범죄 사실을 가릴 수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 자체가 가장 정확한 증거이자 증인이라는 사실을 영화를 보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지만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일본을 움직이기 힘들어 보인다. 다행히도 당시 상황을 담은 몇몇 기록물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리고 2017년에 한국이 이 기록물들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기록물이 유네스코 유산에 등록되기 위해서는, 인권이나 평화와 같은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에 맞으며 대체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위안부 기록물이야 말로 이 기준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일본과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 간의 전쟁에서도 여성의 인권 피해는 종종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를 인지하고 되새김으로써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인권과 평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기록물은 세계유산에 등록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는 식민지 시기에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관련 국가와의 협상이 필요하다며 등재를 보류시켰다. 여기에 일본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유네스코에 많은 분담금을 내는 나라이며, 미국이 유네스코를 탈퇴한 이후 일본의 비중은 더 커졌다. 일본은 분담금을 일시적으로 납부하지 않는 방법 등을 통해 위안부 기록물 등록을 저지하였고, 등재 보류 결과가 난 뒤 다시 분담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가 유산을 등록하는 데 있어서 정치경제적인 요소를 고려한다는 것은 이전에 등록된 다른 유산들, 그리고 유네스코라는 기관에 대한 신뢰에 큰 손상을 입히는 일이다. 피해 사실을 영원히 기억하고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기록물의 보존이 반드시 필요하며 세계기록유산 등록을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1991년에 최초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이 영화 속 TV에 종종 나온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고백하는 할머니들에게 '오래 지난 일을 왜 꺼내는가,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강제로 갔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냐'는 등의 비난이 쏟아진다.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그러한 비난을 받는 것이 더 괴롭고 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당당하게 피해사실을 알렸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했다. 입을 다무는 대가로 얼마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라'는 것이 핵심이다. 어떤 세련된 정치 언어도, 경제력을 앞세운 보상도 '미안하다'는 말을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 외에 어떤 누구도 당시 일본이 행한 여성 인권 유린에 대해 용서할 권리가 없다. 


미래를 위해서 과거의 일은 덮어둘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일본 정부의 인정과 사과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미래에 같은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 제국 시절을 그리워하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범죄 사실에 대한 확실한 인정이 없다면 비슷한 상황이 생겼을 때 또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위험이 있다. 한국인에게 피해를 입힌 후 임시방편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보상을 했으니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 '위안부를 상징하는 소녀상을 철거하라',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사과할 의무가 없다'는 절대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위안부 문제는 지나간 일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없다.


 




남성이 기술하는 역사가 아니라 그녀들이 직접 전달하는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감독이 영화 제목을 'Her Story'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한 내용을 모르고 포스터에 쓰인 'not history, but herstory'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 영어 선생님이 한 말이 떠올랐다. 역사책이나 전기문은 모두 지나간 일을 쓴 것이기 때문에 영어의 과거 시제를 사용한다고 배웠다.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We are history'라고 하면 '우리 헤어졌어'라는 뜻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서 역사가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history가 아니라 herstory인 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그녀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부재판 자체는 역사가 되었을지 몰라도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그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우선 나 하나라도 사실대로 기억하고 기록하며 계속 관심을 두고 있는 일부터 시작해야겠다. 지금까지는 '위안부'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피해 내용에만 집중해서 화난다, 슬프다, 억울하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픈 기억을 꺼내어 세상에 드러낸 할머니들의 용기가 생각난다. 거기에는 이 영화가 큰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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