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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Mar 26. 2018

[영화]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라고 불리고 싶었던 소녀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레이디 버드'를 보았다. 작품상을 받은 미국 코미디 영화에는 약간 난해한 개그코드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우에 불과했다. 한 고등학생 여자아이의 성장통을 보며 웃을 수 있었고 영화의 배경이 된 새크라멘토라는 도시의 매력에 푹 빠졌다.






크리스틴이라는 괜찮은 본명을 두고 굳이 부르기 힘든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고등학교 3학년 소녀가 있다. 어릴 때부터 자라온 작은 마을과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찾기 바라지만 아직은 어려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어렵다. 그래서 자신만의 독특한 이름을 짓는 걸로 대신한다. 이 아이에게는 그것이 작지만 뿌듯한 반항일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며 존중해준다.


내 닉네임도 새와 관련된 것이라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에 친근감이 들었다. 나도 한때 내 이름이 너무 흔하고 예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미 결정된 이름을 바꾸기는 어렵고 그나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영어 이름을 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엘리자베스'라는 고전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이름을 골랐는데, 왠지 새로운 자아가 생긴 것 같고 영어도 더 잘하게 될 듯한 터무니없는 뿌듯함마저 들었다.

어느 날 새로 알게 된 외국인 친구가 나에게 이름을 물어서 엘리자베스라고 얘기해줬다. 그런데 그 친구가 멀리서 엘리자베스라고 불러도 나는 전혀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혀 내 이름 같지가 않아서 부르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름이라는 것이 그저 단어 하나가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을 포함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크리스틴은 새크라멘토와 엄마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한다. 레이디 버드라고 불릴 때에는 잠시나마 기존의 '나'에서 벗어나는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원래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기에는 이미 새크라멘토도 부모님도 자신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이미 좋아하고 있었지만 크리스틴 스스로가 그저 잘 몰랐을 뿐이다.    






크리스틴의 엄마는 항상 짜증이 많은 사람이다. 어린 딸이 힘든 가정 형편을 직시하도록 매일같이 현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첫사랑에 마음 설레며 집에 돌아온 크리스틴에게 옷 정리를 안 했다며 잔소리를 해서 김을 팍 새게 하기도 한다. 잔소리라고 하면 우리 엄마가 세계 최고인 줄 알았는데 외국 영화 속에서 그보다 더 한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그래서 크리스틴의 소소한 일탈에 나도 덩달아 마음이 상쾌해졌다.

딸의 입장에서 보면 왜 저렇게 짜증을 낼까 싶은데, 같은 여자로서 엄마의 인생을 산다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 때가 종종 있다. 영화 초반부에는 크리스틴의 엄마가 미웠지만 뒤로 갈수록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을 꾸려나가느라 주말도 없이 일해서 몸과 마음은 지쳐있다. 자신의 딸만은 완벽하게 자라서 그런 고생을 안 시키고 싶다. 그리고 크리스틴이 그렇게 원하는 뉴욕의 학교에 보내주고 싶어도 형편이 좋지 않은 데다가 딸과 떨어져 사는 게 못내 서운하다. 하지만 크리스틴에게 이러한 속마음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모진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자신 스스로가 미워서 더 짜증을 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방식이 달랐을 뿐,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떤 엄마와도 다르지 않았다. 딸이 마음의 상처를 입고 훌쩍일 때 안아주는 엄마는 진정한 크리스틴의 편이었다.






성장통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아마 사랑일 것이다. 크리스틴은 첫 번째 남자 친구와 어쩔 수 없이 헤어지고 새로 마음에 둔 남자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 그의 주변 사람들과 친해지려 노력한다. 그중 한 명인 제나는 전형적인 '부잣집에 살면서 예쁘고 불친절한 여자아이'였다. 크리스틴은 그런 제나와 친구가 되기 위해 좋은 집에 산다고 거짓말을 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거친 말을 내뱉는다. 결국 거짓말은 들통이 나고 제나는 자신을 속인 크리스틴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제나는 그런 거짓말을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크리스틴이 왜 그랬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미 가지고 있어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갖기 어려운 존재일 수 있다는 걸 알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크리스틴에게 사랑은 생각보다 달콤하지 못했다. 아픔을 겪었지만 그만큼 자신과 맞는 상대를 찾기 위해 수업료를 지불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고 하는 모양이다.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다가가서 'Hey'라고 말만 걸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크리스틴이 아니고서야 과연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말 같다.






모델의 몸매를 부러워하고 새로운 곳에서의 생활을 동경하는 크리스틴이 점점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영화가 다소 갑작스럽게 끝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크리스틴의 성장을 보기에는 충분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계속 성장해나가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한번쯤 크리스틴과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어쩔 때는 그저 허무맹랑해 보이는 크리스틴의 행동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런 걸 보면 어느 나라나 사람이 겪고 느끼는 건 비슷한가 보다. 웃으면서도 한번쯤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작품성 있는 코미디 영화가 어떤 건지 '레이디 버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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