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일어난 기적 같은 만남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영화였다. 같은 제목의 책을 원작으로 2005년에 만들어진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당시에 정말 감동 깊게 보았기 때문에 이번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했다. 한국 버전에는 전체적인 줄거리를 은유적으로 담은 펭귄 동화가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 어떤 판타지적인 요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동화는 현실에서 말이 안 되는 것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듯이 이 영화 속 내용도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처럼 여겨져서 인물들의 감정에 더 이입할 수 있었다.
수아는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 지호에게 펭귄 동화를 남긴다. 구름나라로 떠난 엄마 펭귄이 1년 뒤 장마철에 다시 와서 비가 오는 동안 아들 펭귄과 함께 한 뒤 돌아간다는 내용이다. 지호는 그 이야기를 굳게 믿으며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우진은 그런 아들을 묵묵히 지켜본다. 그런데 다음 해 장마철이 되자 정말 수아가 나타났고 선물 같은 짧은 시간을 함께 한다.
"이번 장마는 조금 더 길어질 예정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너무 많으면 만족을 느끼기 어렵고, 관심 없던 것도 너무 적다고 생각하면 왠지 애착이 간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지루한 일을 하더라도 곧 끝날 것이라는 걸 알면 매 순간이 특별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이 영화 속 가족에게는 장마철이라는 짧은 시간만 허락되어있다. 게다가 내일 당장 올지 안 올지 모르는 비에 따라 시간이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으니 너무 불안하다. 평범한 가족이었다면 서로 사랑하면서도 어쩔 때는 미워하는, 지지고 볶는 때가 있겠지만 이 가족에게는 그런 시간마저 너무 아깝다. 그런 점 때문에 함께하는 모습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고 이별은 한없이 슬펐다.
작년에 우리 집 강아지가 심하게 아픈 적이 있다. 처음에는 심각한 상태인지 모르고 여느 때처럼 약 먹으면 낫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동네병원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했고 큰 병원에서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강아지를 입원시키고 돌아오니 집이 텅 빈 것 같았다.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그렇게 좋아하는 공놀이를 실컷 해줄걸, 날씨 좋을 때 같이 나들이 좀 자주 갈걸 왜 그렇게 귀찮아했을까 하며 후회가 밀려왔다. 다행히 기적처럼 몸이 나아진 강아지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자마자 새 공을 꺼내어 실컷 놀아주면서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지금은 영원히 함께할 것만 같아도 그 시간이 예상보다 짧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는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인데 같이 하는 시간이 더 소중해졌다.
항상 얼굴 맞대고 사는 가족도 언젠가는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서로 더 잘하게 되지 않을까. 영원할 것 같던 시간의 끝은 갑자기 찾아온다. 오히려 이 영화 속의 가족은 그 끝을 예측하는 데 '비'라는 단서라도 있으니 그나마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가족보다 더 재밌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야 할 것만 같다.
"아무 걱정하지 마. 우린 잘 할 거야. 그렇게 정해져 있어."
결혼은 상대방을 선택하는 것이라기보다 그 사람과 함께 할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 다른 이들이 정해놓은 가치와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의 방향으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수아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우진과 결혼을 했다. 자신이 우진과 어떤 삶을 살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확신이 있었다. 어떤 선택이든 좋은 점만 있을 수는 없듯이 행복한 삶 뒤에는 이른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아는 자신이 우진을 만나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알면서도 행복을 택했다.
만일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데스티네이션처럼 어떤 선택을 해도 죽을 날은 정해져 있다면 당연히 고민할 거리가 안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진을 저승사자 보듯이 대하거나,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혹은 결혼 자체를 회피하는 길도 있다. 그러면 과연 더 행복할까. 어떨지는 모르지만, 수아가 우진을 모르는 채로 두 번 만나 두 번 다 사랑에 빠지는 것을 보고 아마 나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라면 이 사람과의 행복을 놓치기에는 너무 아깝다. 어차피 얼마나 살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누가 그래. 엄마는 100년을 살았어도 지호 없이는 행복하지 않아."
게다가 우진과의 미래에는 지호라는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 우진과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지호 또한 만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출산을 하자마자 아기를 안고 '내가 이 아이를 낳으려고 세상에 태어났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아이를 갖는다는 건 그 정도로 소중한 일이구나 싶었다.
수아는 자신이 없을 때 아들이 스스로 씻고 밥하고 빨래를 널 수 있도록 가르쳐준다. 엄마와 아들 모두 장마철이 끝나면 다시 다가올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직 어린 아들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버틸 수 있도록 돕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이처럼 낭만적이고 애절한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코믹 요소가 곳곳에 있어서 마냥 슬프지만은 않았다. 고등학생인 수아와 우진의 풋풋한 모습을 보며 어릴 적 했던 장난과 추억이 떠올라 정말 재미있게 봤다. 그런 건 아마 한국 사람들만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개그코드일 것이다. 기존 영화와 동일한 내용에 배우와 배경만 바뀌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우리 나름의 정서로 각색을 거친 것이 좋았다. 덕분에 러닝타임 131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님에도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항상 지겹게 반복되는 것이 삶이라지만 그마저도 시간이 주어져야 가능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 오히려 평범해서 더 소중하다. 이 영화는 독특한 이야기로 소소한 추억과 일상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알 수 있게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