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다른 사연을 가진 네 가지 만남
영화 '더 테이블'은 평범하면서도 신선했다. 어느 카페의 한 테이블에 앉았다 가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느낌이 들었다. 그 테이블에는 하루 동안 총 4쌍이 다녀가며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건너 듣는 입장이라 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세하게는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두 사람이 어떤 관계고, 지금 무슨 상황이구나'하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1. 이별 후 다시 만난 두 사람
첫 이야기는 헤어진 연인이 재회를 하는 장면이었고, 보면서 가장 많은 탄식이 뿜어져 나온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이 헤어진 뒤 여자는 어느새 유명한 배우가 되어있었다. 처음에는 이별의 안타까움, 좋은 추억이 묻어나는 만남이었지만 뒤로 갈수록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이 유명한 배우와 사귀었다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증거를 찾으러 나온 것으로 보였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뭐하러 저런 소리를 할까' 싶었다. 다시 만나기 전에 그나마 남아있던 좋은 기억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여자의 표정에 드러났다.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건 어떤 이유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하면 좋았던 기억만 남는다고 하던데, 그래서일까. 아니면 어떤 기대감이나 궁금함 때문일까. 괜스레 사귀었던 사람의 SNS를 들춰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나는 헤어지고 나서 다시 연락하거나 만나는 건 별로 좋을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어떤 말을 주고받아도 재회하기 전보다 나아질 게 없을 것 같아서다. 품고 있던 좋은 추억이 망가질까봐 아깝고 나쁜 추억은 다시 되새겨질까봐 두렵다.
2. 짧은 만남 후로 오랫동안 서로를 간직해온 인연
이 두 사람은 대화하는 내내 뭔가 불편해 보인다 싶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커플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여자는 관계가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남자가 별안간 해외로 여행을 떠난 뒤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여자는 말할 때마다 가시가 돋쳐있었고 남자는 그걸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아마도 남자는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여자와 인연을 이어갈 자신이 없어져서 여행길에 올랐나보다. 하지만 그녀를 잊을 수 없었고 가는 곳마다 보이는 예쁜 물건들을 사 모으며 '다시 만나서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도 그동안 꽤나 그리워하며 연락을 기다린 것 같다.
두 사람을 보니 이적의 '비포 선라이즈'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총 3번 만나고 이날 다시 본 것이 전부인데도 서로 강한 끌림이 있었다. 서로 그리워했다는 걸 확인하고 냉랭했던 분위기가 풀어지는 걸 보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서는 '우리 집에 같이 가자'는 남자와 그에 따라나서는 여자를 보니 '으이그-'싶었다. 이 커플은 해피엔딩이라 마음에 들었다.
3. 거짓된 관계의 두 여자
두 사람은 프로페셔널했다.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은희는 엄마뻘되는 숙자에게 행동을 하나하나 지시했다. 곧 치를 결혼식의 가짜 모녀가 될 사람들이었다. 은희는 그동안 결혼 사기로 돈을 모아 왔던듯하고 숙자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은희의 이번 결혼식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미 자신이 벌여놓은 거짓말들 때문에 가짜 가족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안 숙자는 세상을 떠난 딸을 떠올리며 정을 느낀다.
마음이 따뜻해질만 하다가 이야기가 끝이 났다. 두 사람이 모녀의 정을 잠깐 느낀 건 좋았지만 어찌 되었거나 거짓이니 마냥 좋게만 바라볼 수는 없었다. 누가 신랑이 될지 참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저래 가지고 오래 살겠나 싶기도 했다. 저렇게 시작하면 평생을 거짓말과 각본에 맞추어서 살아야 하는데, 상상만 해도 피곤하다. 똑 부러진 은희였지만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4. 인연을 끌고 가고 싶은 여자와 정리하려는 남자
결혼을 앞둔 혜경은 이전 남자 친구였던 운철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바람을 피워서라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운철은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혜경의 말로 짐작해볼 때, 조건 때문에 지금의 남자를 선택했지만 마음은 운철에게 남아있는 것 같다. 운철에게 거절당하는 혜경이 절절해 보였지만 실상은 사랑과 조건을 모두 가지고 싶은 여자였다.
간혹 결혼 후에 이전의 연인을 만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귀는듯 사귀지 않는듯, 위험 수위를 넘을듯 말듯한 상태로 만남을 지속한다. 그러면서 서로 애절함을 느끼고 마치 영화의 한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한다. 내가 아직 미혼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고지식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이해하기가 어렵다. 감정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해도 행동은 절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책임을 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 누군가에게 여지를 주는 것은 본인에게도, 상대에게도 좋은 선택이 아니다. 배우자는 물론이고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애인에게도 상처를 주는 관계가 아닐까.
하긴 애인이나 배우자가 있는 상태임에도 다른 이성들과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는 여자 혹은 남자를 보고 능력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애매한 관계를 펼쳐놓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짝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의 마음도 재물처럼 되어서 다양하게 많이 쌓아두는 것이 능력의 척도가 되어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카페에 혼자 앉아 이것저것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옆 테이블에서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가 있다. 다른 사람이 내 이야기를 엿듣는 건 싫어도 내가 건너 듣는 건 재미있다. '더 테이블'은 그런 심리를 교묘히 활용한 영화였다. 호기심을 일으키는 대화를 들으며 '뭔데요, 왜 그런데요'라고 속으로 묻다 보니 어느새 영화가 끝났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총 네 가지 이야기 중 한 가지만 제외하고 모두 남녀 간의 일들인 점이다. 러닝타임이 70분으로 조금 짧은 편인데 여기에 친구나 부녀 등의 관계를 하나 더 추가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평범하지만 나름대로의 사정과 이야기가 있는 우리들과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많이 닮아있었다. 영화 '최악의 하루'를 만든 김종관 감독의 이번 작품도 잔잔하고 담백했다. 여백을 채우는 즐거움을 주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