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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라잉로빈 Sep 03. 2017

[도서] 쇼코의 미소

담담하지만 날카롭게 들어오는 공감

이 책은 '쇼코의 미소'를 포함하여 총 7가지의 이야기가 실린 최은영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신비로운 표지만큼이나 강한 흡입력을 가진 이야기들이 있었다. 일상적인 배경과 평범한 인물들이지만 감정을 세심하게 포착하여 생생하게 써 내려간 문장들로 색다른 경험을 했다. 소설과 똑같은 상황은 아니라고 해도 내가 언젠가 생각했었던 것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나여도 그렇겠다'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많았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 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 쇼코의 미소 P. 24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이상하게 꼭 단짝 친구가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약 40명 정도 되는 반에서 내가 비밀을 공유하고 서로 챙겨줄 한 사람. 소풍에 갈 때는 좌석버스에 함께 앉고 등하교도 심심하지 않게 해줄 친구 말이다. 만일 친한 친구 그룹이 홀수면 좌석버스에서 어떻게 앉아야 할지에 대해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함께 어울리는 친구가 다섯 명이었는데, 짝을 지어야 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참 골치가 아팠다. 지금 생각하면 참 신경 쓸 것도 많다며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심각했다. 내 단짝 친구가 다른 아이와 더 친한 것 같으면 질투가 나고, 이유 없이 툴툴거리면 신경이 쓰였다. 돌이켜보면 그게 아마 연애 같은 우정이 아니었나 싶다.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와 친한 것이 싫고 연락이 뜸하면 마음에 걸리는 것처럼 말이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에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 씬짜오, 씬짜오 P.89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지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P.115

어릴 때는 헤어졌다고 하면 먼저 끝내자고 한쪽이 누군지에 대해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먼저 떠나지 않으면 어딘가 밑지는 사람처럼 되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네가 헤어지자고 했어?'라고 묻는 말이 참 부질없게 들렸다. 떠나거나 남거나 둘 다 상처받기는 매 한가지고, 반드시 이렇다 할 계기가 없어도 서로 멀어지기 시작할 때에는 누가 먼저 떠나는가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남겨둔다, 떠난다라는 개념이 반드시 남녀 사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정말 가깝다고 여겼던 친구와 멀어졌을 때도 역시 마음이 아팠다.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함께 지낼 때에는 느낄 수 없던 것들이었다. 친구가 나를 떠날 때도, 내가 일부러 연락을 피한 적도 있었지만 한 달 두 달 만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면 그립지만 연락을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새로 만난 사람들과의 적정한 거리를 만들어간다. 나중에 떠나거나 남아도 덜 상처받는 거리를 찾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 때만큼 완전히 내보이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나는 한지가 코뿔소의 마음을 상상하듯, 한지의 마음을 상상해. 가끔씩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한지의 집 발코니에 앉아 있기도 해. 
한지는 나와 가깝다고 무람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나는 그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하지 못해. 한지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면, 모두가 한지에 대한 나의 상상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 그런 면에서 나는 조금은 미친 사람 같지. - 한지와 영주 P.157

여행에서 만난 '한지'라는 남자를 좋아하게 된 영주의 이야기가 있었다. 섬세한 묘사와 세밀한 감정표현으로 직접 영주가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주가 한지의 어떤 부분에 끌리는지, 함께 있는 시간이 얼마나 편안한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혼자 간직하고 있을 때의 감정이 떠올랐다. 전혀 관계없는 일에서도 그 사람이 생각나고, 그가 했던 행동과 말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상상,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 등이 기억났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면 일부러 무심코 반응해놓고 혹시 내 마음이 들킨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사람을 좋아하면 누구나 다 그런 걸까. 어떤 사람이 날 좋아한다고 하면, 그 사람도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처럼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온 건지 궁금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상처도 크기 때문에 혼자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혼자 좋아하고 혼자 이별 준비를 하는 것 같아 슬프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경험이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용기를 내보기도 하고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는 날아갈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은 죄였다. 아니, 그건 꿈도 아니었다.
영화 일이 꿈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꿈을 좇았다면 나는 적어도 어느 부분에서는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감독이 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영화판에서 비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썼지만, 이야기는 내 안에서부터 흐르지 않았고 그래서 작위적이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써야 하기에 억지로 썼다.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 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 쇼코의 미소 P.33 

오랜 꿈일수록 내려놓기가 힘들다. 시간이 흘러 변한 나 자신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예전에 품었던 꿈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아니면 목표를 잃었을 때 오는 막막함이 두려워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꿈이 더 이상 희망이 아니라 고통만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교에 다닐 때 우연히 들은 심리학 과목에 흥미를 느껴서 복수전공을 했고 대학원에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졸업 후 곧바로 대학원에 가지 않고 취업을 하면서 꿈이 지연되었지만 언젠가 나는 심리학을 다시 공부할 거라고 마음을 먹었다. 주말에는 심리학과 관련된 강연 등을 들으러 다녔고 퇴근 후에도 마냥 쉴 수 없었다. 책장은 심리학 관련 서적들로 채웠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관심 있던 분야는 실험심리학이었는데, 강연을 들으면서도 어딘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고 관심도 많이 줄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도망가고 싶은 거라고 생각하며 다시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이건 더 이상 꿈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마음속의 나와 마주치기 싫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목표가 없어진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꿈을 위해 공부하는 시간이 점점 힘들게만 다가왔다. 단순히 내 만족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이루고 싶다',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계속하다 보면 뭔가 있을지 모른다' 등의 마음이 덧붙기 시작했다. 결국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로 마음을 먹고 정리했다. 당장에는 막막함이 컸지만 돌이켜보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우리 곁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건 생에 대한 무책임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방임도 아니었다는 것을. - 씬짜오, 씬짜오 P.92

허태균 교수는 '우리 사회는 노력하면 반드시 보상받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는 원인을 노력 부족으로 돌린다. 하지만 노력 외에도 환경, 재능, 운 등 다양한 원인이 작용하며 성공이라는 것 자체에 확률이 낮을 때가 많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속담도 있을 만큼 노력이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실패는 곧 사람의 문제가 된다. 이는 비난으로 이어지고 죄책감을 낳는다. 물론 노력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높아지기는 하겠지만 어떤 것도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열심히 했음에도 잘 되지 않은 다수의 경험, 혹은 별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생각보다 잘 된 소수의 경험들이 모여 노력과 성공의 인과관계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것을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겠지만, 만일 있을 실패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었으면 한다.  


  

가끔씩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 쇼코의 미소 P.43

어디선가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가정하고, 오늘 하루만 찾아와 내 앞에 계시다고 생각하면 더욱 소중하게 보일 것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상상만 해도 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나도 모르게 문득 짜증을 냈거나 묻는 말에 대충 대꾸했다 싶을 때 이 말이 종종 생각난다. 뒤돌아서 후회하기 전에 좋게 행동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꼭 그렇지 못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항상 같은 자리에 있을 것처럼 여기는 내가 참 어리석다. 그렇다고 매일을 마지막처럼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영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마음 한켠에 넣어두고 지낸다면 그렇지 않을 때와 많이 다를 것이다.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 미카엘라 P.238

어느 날 장례식에 가면서 '이제 누군가를 보내는 일은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철없는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살아간다면 주변의 누군가는 떠나기 마련이고, 내가 겪은 것은 극히 적음에도 벌써 약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수없이 경험해온 사람들은 시린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 왔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영어의 시제를 배울 때 칠판에 수평선으로 타임라인을 그려놓고 과거, 현재, 미래를 표시하는 것이 조금은 억지스럽다고 여겼다. 그런데 실제로 시간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 같다. 내 기준에서 일생이라는 선을 긋고 A와 B라는 점을 찍었을 때 A지점에 있던 사람이 B지점에는 사라져 있다. 반대로 A지점에 없던 사람이 B지점에 새로 있기도 하다. 어느 날 과거로 돌아가는 꿈을 꾸었는데, 거기서 지금은 없는 사람들을 보았다. 미래를 알려줘야 할까 잠깐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참 희한한 꿈이어서 기억이 난다.



“네가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네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 먼 곳에서 온 노래 P.205

좋지 않은 일로 마음이 가라앉아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느꼈던 날, 문득 저녁에는 뭘 먹을까 생각하는 나를 보며 웃음이 났다. 안 좋은 기분도 어차피 흘러갈 일시적인 감정인데 거기에 너무 집중하면 심각한 일처럼 보인다.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나 걱정이 자꾸 떠오르면 아예 유효기간을 정해서 실컷 생각해보거나, 우선 내려놓고 며칠 뒤에 다시 끄집어내보기로 한다. 그러면 별일 아니었구나 싶을 때가 은근히 많다. 아니면 적어도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반드시 명확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지만 우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어서 좋다. 거기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책을 읽기 싫어하던 나는 짧은 소설이 참 좋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집중할 만하면, 주인공과 정 붙일 만하면 끝나버리는 단편 소설이 아쉬웠다. 그래서 단편 소설집은 피하는 편인데 '쇼코의 미소'는 이야기의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충분히 깊게 빠져들 수 있었던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아 종종 떠오른다. 잔잔한 소재로 마음에 큰 파도를 일으키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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