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라잉로빈 Oct 24. 2016

[도서] 점선뎐

자신에게 솔직하고 당당했던 그녀 이야기

어느 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화가 김점선 님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김점선 화가가 다른 사람을 인터뷰하고 그에 대해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그때 말 한마디 한마디를 힘주어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참 인상적이었던 데다가 내가 생각했던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예술가'라는 이미지에 정말 잘 맞는 분이라서 궁금한 마음에 그림을 찾아보고 팬이 되었다.


이 책은 김점선 화가의 자서전이다.

자서전은 보통 그 사람의 이력이 나오고 '나는 무얼 했고 무얼 이루었는데 그 과정은 이랬다'라는 식인데 이 책은 조금 달랐다. 함께 길을 걷거나 차를 마시며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듣는 것 같았다. 일대기를 시간 순서대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를 간접적으로 알고 느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슬슬 나도 앙데팡당전에 그림을 내고 싶은 맘이 생겼다. 용기가 아니라 만용에 가까운 오기였다. 8.15, 아침 신문을 무심히 읽다가 내 이름 석자를 발견했다. 앙데팡당전에서 국가대표로 출품할 사람으로 뽑혔다고. 나조차도 머리가 띵했다. 
그 후의 학교생활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늘 누군가가 밥 먹자고 술 먹자고 제안하고.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천재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회의가 일었다. 이것이 정말 내 그림인가. 나 자신의 생애에 뿌리를 둔 욕망에서 생산된 그림인가? 아니었다. 프랑스 파리 본부에서 주제를 주었다. 그것에 시험 치듯이. 정답을 내듯이. 합당한 작품을 낸 자를 세계 각국에서 뽑아들여서 프랑스의 권위를 세우는 일에 앞잡이처럼 참여하는 일이… 그런 회의는 몇 년 후 내 자신안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도로 자라났고, 드디어 홍대 사단을 벗어났다.
현대 회화의 개념을 모두 무시한 원초적인 그림 세계로 나는 들어갔다. 지식은 지식이고 그림은 그림이다. 지식은 대사회 방어용일 뿐이다. 누군가가 내 그림을 욕하면 마주서서 싸운다. 그럴때 내 그림을 보호하고 나의 감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쓰는 무기가 지식일 뿐이다. 지식이 내 그림의 재료나 원천이 되지는 못한다. 나는 무식한 인간 김점선으로 돌아가서 행동하고 원시인 김점선이 되어서 그림 그린다.

이 부분에서 김점선 화가의 그림이 편안함과 행복감을 주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림은 꾸미지 않은 순수함과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담겨 있어 억지스럽지가 않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내면의 소리는 듣지 못한 채 세상이 세운 기준에 따라가기 쉽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표현하고자 것과는 다르게 무언가를 덧씌우고 꾸며서 마치 들뜬 화장처럼 어색하게 만든다. 김점선 화가는 허울과 거품을 걷어내고 순수한 내면세계를 그대로 표현하는데 힘썼다.




차츰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 자신도 고통스러운 세월을 살게 되었다. 내 모습은 가난에 찌들어 거칠어졌다. 낡은 옷을 걸치고 먹을 풀을 뜯으러 산을 헤매는 날도 있었다. 무명작가인 내가 그린 그림을 사람들은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그런 그림을 그리는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런 세월에 나는 백조왕자를 기억해냈다. 헝클어진 모습으로 미친 듯이 풀옷을 짜는 공주를 생각해냈다. 마녀라고 부르면서 변명을 요구하는 군중들을 생각해냈다. 그러면서 그 침묵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몰두를 같이 기억해냈다. 그렇다. 말없이 몰두하는 것이다. 말없이 열심히 열심히 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 그림이 완성되면 세상이 내게 건 마술도 풀릴 것이다. 나는 그런 심정으로 그림을 그렸다.
변명은 낭비다. 변명은 내가 나아갈 길이 아니다. 오로지 내 속의 나침반만 바라보면서, 내 감성이 이끄는 대로 그림을 그려나가면 길이 열릴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침묵 속의 몰두, 그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릴 때 읽었던 백조왕자 이야기가 기억난다. 마법에 걸려서 백조가 된 왕자들을 위해 밤낮으로 풀옷을 만드는 공주를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그녀를 마녀로 몰아넣어 화형에 처하게 되었다. 처형이 임박했을 때 공주가 완성한 풀옷들을 공중에 던지자 왕자들은 그 옷을 입고 마법이 풀렸으며 공주에 대한 오해도 사라졌다.

그 동화를 처음 읽을 때는 단순히 '엉겅퀴로 어떻게 옷을 만들지? 입어도 정말 따갑겠다.'하며 마치 내가 그 옷을 입은 것처럼 온몸이 따끔따끔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나는 참 일차원적인 생각을 했는데 지금 보니 많은 의미가 있는 이야기다.

수 없이 내려야 했던 크고 작은 결정들과 내 생각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렇지 못하면 내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 같아 불안하고 외로웠다. 내가 이상한 건지 세상이 이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만큼 나 자신을 이해해주는 타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의 인정을 바라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내 생각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였다. 자신을 믿는다면 외부의 시선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아닐까. 김기덕 감독의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어라'라는 말도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이해를 찾아 두리번거리기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여 침묵하고 몰두하는 것. 진정한 어른이 되는데 꼭 필요한 요소다.




언니는 볕이 잘 드는 마당 가운데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내려다보이는 데다 꽃밭을 만들었다. 나는 아침 햇빛만 드는 굴뚝 옆에다 땅을 파고 모종을 심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나는 꽃 색깔이 짙게 피는 그늘이 좋아.'
언니 밭에서 먼저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참 후에 그 엉성한 내 밭에서도 꽃이 피었다. 아주 짙은 붉은색이 나타났다. 나는 기뻤다. 내 꽃밭이 자랑스러웠다. 언니 밭에는 훨씬 더 많은 꽃들이 펴 있었다. 그래도 색채들이 비교가 안 되게 희미했다. 
빛이 충분한 언니네 채송화는 줄기도 잎도 통통했다. 채도는 훨씬 낮다. 나는 색감을 중요시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색채를 얻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부심을 느꼈다.  
그 후부터 나는 늘 비밀리에 자뻑했다. 그러면서 내색 안하고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래서 채송화는 내 이생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내 자부심. 나의 첫번째 승리. 만족. 아름다움에 몰두하는 인간의 상징. 굶으면서 심고 가꾼 꽃. 굶어 죽어가면서도 아름다움에서 환희를 느끼는 인간의 본능을.

'스테이션 일레븐'이라는 책에서 독감으로 모든 문명이 종말 된 후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슬로건을 걸고 떠돌아다니며 셰익스피어 희곡을 공연하는 악단이 나온다. 무대도 엉성하기 그지없고 의상도 누더기에 불과하지만 관객들이 공연을 관람하며 감동을 받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그런 세상이 온다면 지금처럼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할 감정이 나에게 남아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이 글에서 어느 정도 해답을 얻었다. 먹고 입고 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도 하나의 본능이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더라도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겠구나 싶다. 

가끔 누군가와 같이 그림과 음악을 감상하다가 '나는 이런 거 잘 몰라서 별로다'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 자체를 느껴보라고 말한다. '아름답다'는 지식이 아니라 본능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작품에서 별 감흥을 못 느낄 수도 있고 인정받지 못한 작품에서 감동을 느낄 수도 있다. 대상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자신이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사람은, 이 세상은 선과 악으로 버무려진 존재라는 걸 알아야한다. 더 나아가서 선과 악을 나누는 관점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선에 치우친 교육을 받는다. 선한 체하는 인간들과글과 책을 늘 만난다. 구역질이 난다.
악을 알지 않고서는 어떤 사소한 일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 

이상적인 모습만 그려내는 작품은 뭔가 빠지고 어색한 느낌이 든다. 반면에 우리 사회에 있을 법하고 인간이라면 한 번쯤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추악한 면을 드러낸 작품을 보면 참 잔인하고 적나라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기준에서 심하게 지나친 것까지 포용할 능력은 없어도 그러한 작품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찬성하는 편이다. 어딘가에는 존재하지만 쉬쉬했던 것들에 대해 누군가는 이야기로 끄집어내어 선과 악의 관점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달라져 있었다. 암이 생겼다는 것. 그것을 치료한다는 것. 그리하여 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살아온 과거의 나날들이 이렇게 다 우습고 다르게 느껴진다는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내가 아픈게 아니라 드디어 본래의 예민한 감각을 되찾아, 드디어 비로소 인간이 된 듯했다.
눈앞에서 비밀을 다 펼쳐 보여줘도 모르던 과거가 너무 생뚱맞아 보였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다 드러내서 나열해놨는데도 인간들이 못 느끼고 못 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문제와 답이 다 쓰인 칠판 앞에서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답인지를 모르는 멍청이일 뿐이구나! 조롱당한 느낌! 나의 긴 생애가 온통 조롱당한 시간이라니. 

삶의 끝자락에 놓인 김점선 화가의 이 말은 강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스티브 잡스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자신이 인생의 마지막에 서있다고 생각한다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항상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무모한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살아갈 것처럼 삶의 두려움에 갇혀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고 주변도 둘러보지 않는다면 후회만 남을 것이다.




읽으면서 솔직하면서도 당찬 김점선 화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성공 이야기를 나열하기보다 삶에서 느낀 생각과 관점을 스스럼없이 담은 이 책이야말로 진정한 자서전이 아닐까 싶다.



마티스처럼 지팡이로도 지탱할 수 없는 뚱뚱한 몸. 그래도 그의 마지막 작품은 모든 걸 바쳐도 아깝지 않은 걸작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걸작을 남겨야 한다. 한 번이라도 예술가라고 불린 자라면 그래야 한다. 무언가를 아끼고 무언가를 조심하느라 주춤거리고 그러면서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자는 예술가가 아닌 협잡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남과 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