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여행하는 걸 선호했는데 생각이 바뀐 계기가 있다. 엄이랑 빈에 일주일 정도 머물렀을 때다. 내가 많이 아팠을 때라 엄은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내겐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가장 좋았던 건 엄과 레오폴트 미술관을 함께 구경했을 때다. 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시관을 돌았다. 전시관을 옮길 때마다 “내가 여기서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 뭐게?” 서로 물었다. 맞힐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었다. 그냥 그렇게 둘의 경험을 맞추어 보는 게 즐거웠다. 함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에곤 쉴레의 그림을 감상했고 다음 전시실로 가기 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읽는다. 둘만 있는 공간에서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걸으면서 이야기할 때 좋을 때가 있단다. 둘 사이 ‘매개’하는 것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려워서 책장을 넘기지 못했던 <걷기의 인문학>에 이런 얘기가 더 있다고 해 좀 더 힘내서 읽고 싶어 졌다.
홍대 살 때 밤이면 룸메들과 산책하곤 했다. 우리 유대감의 어느 정도는 산책 덕분은 아닐까 생각한다. 연남으로 망원으로 합정으로 상수로 걸으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우리의 말은 그냥 외침이 아니라 ‘이야기’가 됐다. 혼자 생각했으면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어, 그렇게 중얼중얼 거렸을지도 모른다. 마주 보고 이야기했으면 그 사람의 반응에 실망해 역시 인간은 외로운 것이라고 자기 전 침대에 엎어져 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함께 걸으니까 나의 말이 이야기가 되었고, 나누고 나니 후련한 것이 되었다.
걸으면서 고통을 말할 때 상대는 내 얼굴을 마주할 때보다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고통에 답할 수 있다. ‘가치 판단’을 바로 하지 않아도 되고, 좀 더 긴 이야기도 참고 들을 수 있다. 말하는 이도 답하는 이도 세계를 좀 더 둘러보고, 상대방과 적당한 ‘사이’를 유지할 수 있다. 말하는 이도 여유 있게 말할 수 있고, 답을 들을 땐 듣는 이의 ‘즉각적이지 않은’ 답을 받아들일 수 있다. 대화가 가능해진다.
함께 걷고 싶다. 세상을 납작하게 보지 않으면서. 동원당하지 않고 동행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