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확실히 검정치마를 좋아했다. 1집도 들으면 들을수록 좋았고 2집을 들으면서는 거의 울고 싶어졌다. 지산 락페스티벌에서 라이브를 처음 보고 들으며 방방 뛰었다. 그래서 1, 2집을 관통해 흐르는 찜찜하고 구린 면을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3집에서 구림은 더욱 짙어져 더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이건 적나라하거나 그로테스크해서가 아닌, 명백히 빻아서 구림이었다. 외면할 수 없었다. 첫 사랑이 ‘창녀’가 됐다는, 평범한 내 주변 여자들은 뭘 모른다는, 너무 똑똑한 척하는 여자들은 버려두고 멍청하고 섹시한 당신과 더럽게 놀고 싶다는 그의 감성이 그렇게 유니크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물론 그가 무고한 변태일 수 있겠다. 그냥 애인이 아빠라고 부르는 걸 좋아하고 성관계하며 욕을 하는 걸 좋아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필 쓴 표현이 “넌 내가 좋아하는 천박한 계집아이”였을 뿐. 자기 주변 인간을 성별을 막론하고 싫어할 수도 있다. 하필 그가 비난한 게 ‘음악하는 여자’였을 뿐.
이렇게 하나하나 안 듣다보면 들을 수 있는 아티스트가 누가 있나, 그런 걱정도 들고 흑흑 내가 이렇게 좋아했던 검정치마를 더이상 듣지 않아야 한다니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좋아하는 카페에서도, 좋아하는 유튜브 채널의 플레이리스트에서도 흘러나오는 그를 멀리 하기란 좀 의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산이나 스윙스를 안 듣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최근 어떤 별 같은 아티스트의 공연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확실하게 열렬히 좋아할 수 있는, 무해한 아티스트가 있는데 굳이 그의 노래를 들을 필요가 있을까. 너무 신선하고 황홀하고 완벽한 공연이었다. 세상엔 더 많은 마이크 앞에 서야 마땅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검정치마는 과대 평가 받고 있다. 그의 취향과 정서를 좋게 해석하려 한 거듭된 시도들은 결국엔 실패했다. 그가 애인에게 “아빠”라고 부르라 한, 한 때 좋아한 여자가 “돈만 쥐어주면 태워주는 차”가 됐다고 말하는, 여자들의 음악에선 ‘신음소리’가 난다고 말하는 배경에 은은하고 뚜렷한 여성 혐오가 있다고 확신한다. 더욱이 그는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주저 없이 당당하게 나아가고 있는 반면 어떤 아티스트들은 떳떳하게 해도 될 얘기, 더 많은 사람이 들어야 할 이야기조차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 빽빽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더이상 듣지 않기로, 내 취향과 플레이리스트에서 쫓아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