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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립 Feb 19. 2020

[술터디 다섯째 날] B-52: 털어넣지 말기.

[술터디 다섯째 날] B-52: 털어넣지 말기.

     

제가 칵테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한 맛이 섞여서 새로운 맛과 향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재료를 섞는 과정에서 마시게 될 사람만을 오롯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개별 존재를 존중하되 포용까지 하는 칵테일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술터디 다섯째 날 시작합니다.       



# B-52     

B-52
B-52 만드는 방법

셰리 글라스에 깔루아 1/3, 베일리스 1/3, 그랑 마니에르 1/3을 채우면 완성. 예쁜 층이 생기며 서로 분리되는 이유는 세 리큐르의 비중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섞지 않고 리큐르들을 띄워놓은 채로 마무리하기 때문에 제대로 마시려면 한 입에 털어넣어야 합니다. ‘원 샷’이 기본인 만큼 도수가 약하면 좋을 텐데 도수는 도수대로 높습니다. 게다가 초콜릿·카카오 향이 가득한 리큐르들이어서 맛은 매우 달콤합니다. 취하는 줄 모르고 끝없이 마시다가 큰일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일이나 파티 날, 거하게 취하고 싶을 때 주로 마십니다.   

 

 

뽜이야아아아아~~~

제일 위에 ‘바카디 151’을 띄우고 불을 붙이면 활활 잘 탑니다. 불이 붙을 정도인 걸 보니 도수가 정말 세다는 걸 알 수 있겠죠. 이름 자체도 전략폭격기 ‘B-52'에서 나온 걸 보니 보통이 아닌 술인 것 같습니다.


          


# 다이어트 해보셨나요?     

대학교 2학년 여름, 처음으로 성형외과에 갔습니다. 지방흡입을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키 163cm에 몸무게 52kg, 마르지는 않았지만 뚱뚱하지도 않은 보통 체격. 하지만 저는 살을 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성형외과 방문 결과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상담 실장님은 ‘후~~’ 크게 한 번 한숨을 쉬면서 “다른 다이어트 더 해보고 안 되면 내년에 다시와요.”라며 저를 돌려보냈습니다.

     

저는 포기할 줄 몰랐습니다. 저녁 굶기, 레몬 디톡스, 단백질 쉐이크 섭취 등 온갖 다이어트를 했고, 5kg을 감량했습니다. 살은 뺐지만 폭식증을 얻었습니다. 한 번 이성의 끈을 놓게 되면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음식을 채워 넣었습니다. 숨 쉴 때마다 음식을 욱여넣는다는 말이 맞을 정도였죠.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먹는 제 모습이 ‘역겨워서’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하루 종일 식사 조절하는 생각만을 했고, 계속된 다이어트에 생리를 5개월간 거르기도 했습니다. 목구멍에 손을 넣고 음식물을 게워내기도 했습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방 안에 있던 모든 거울을 깨려고 했던 적도 있습니다.     


꽤나 문제가 있는 상황이었죠. 사실 제가 외모에 집착한 것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도 제 얼굴이 너무 싫어서 어깨를 잔뜩 구부리고 다녔으니까요. 오래 쌓였던 문제가 터진 것뿐이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외모와 다이어트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천천히 뜯어보고,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스스로에게 줬다면 좋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상황을 찬찬히 볼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에 술을 ‘원 샷’하듯 문제 상황도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원래 못생겼는데 살 좀 빠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포기해야지.”라는 한마디와 함께 꽤 오랜 기간 겪었던 괴로움은 ‘원인 불명’인 채 옆으로 치워졌습니다.          



# 해결 못 한 문제를 방치하면 썩어버린다     


배우 프로필 사진을 찍던 날

이 때 치워버린 문제는 몇 년 후 훨씬 악화된 상태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저는 배우를 잠시 준비했습니다. 연기를 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의 삶을 표현하고, 관객에게 울림을 준다는 건 참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좋아하는 연기를 저는 또 꽤나 잘했습니다. 연기학원에서 제 연기를 보고 다른 수강생들이 TV를 보듯 넋 놓고 봤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은 “너 참 잘한다, 연기. 네 안에는 에너지가 있구나.”라며 칭찬도 했습니다.     


좋아하는 연기를 그만둔 이유는 우습게도 외모 때문입니다. 배우는 자신의 색깔, 에너지 등을 잘 보여주는 ‘프로필 사진’을 찍습니다. 저는 다른 배우들이 그렇게 하듯, 프로필 사진을 찍기 몇 주 전부터 다양한 컨셉을 잡고, 연기와 표정을 연습했습니다. 옷도 열심히 샀고, 물론 살도 열심히 뺐습니다.     


하지만 사진 찍는 당일, 제 눈에는 제 얼굴만 들어왔습니다. 같이 프로필 사진을 찍는 다른 배우 지망생의 얼굴과 제 모습이 계속 비교가 된 것입니다. 카메라 속 못생긴 제 모습이 그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웃기지만 그 날로 저는 연기를 그만뒀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예쁜 편이 아니라 먹고 살기 어려울 것 같아 그만뒀다”고 했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습니다. ‘못생긴 내가 감히 어떻게 연기를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더 컸습니다.     


참 자존감이 낮아 보이죠. 맞습니다. 외모와 다이어트에 대한 집착은 낮은 자존감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일 뿐이었습니다. 자존감을 세우고, 나를 천천히 다독이는 법을 저 때부터라도 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저는 또 그러지 않았습니다. “난 돈을 못 벌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내다보고, 못생긴 것도 인정하는 ‘쿨’한 사람이야”라는 달콤한 말로 제 낮은 자존감을 포장한 채, 저는 문제 상황을 또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이전에 치워뒀던 고민이 썩어서 꿈을 포기하게 만들 지경이 됐는데도 ‘나에게 시간을 주고, 천천히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버릇을 또 못 고친 겁니다.          



# 술은 삼켜도, 나는 삼키지 말기.

나팔꽃이 지지대를 타고 올라가듯,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지대도 천천히 곱씹으며 만들어야 훨씬 더 튼튼해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고민을 ‘원 샷’했던 경험이 쌓이다 최근엔 좀 더 크게, 다시 터졌습니다. 배우를 접은 후 저는 몇 년 째 취업을 준비 중입니다. 잘 안 되고 있습니다. 낮은 자존감이 자기 비하로 실현되기 딱 좋은 상황입니다. 이번엔 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좀 더 천천히, 시간을 주고 보듬어 나가고 있습니다. 눈앞에서 잠시 치워두거나 정신승리로 달콤하게 포장해서 꿀꺽 삼켜버리는 게 아니라, 조금 입에 쓰더라도 천천히 하지만 애정을 가지고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B-52는 달콤한, ‘원 샷’하기 좋은 술입니다. 제가 B-52를 좋아해서 그런지 지금까지 모든 어려움을 오랜 고민 없이 한 번에 털어넣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오래된 문제가 곪아버려서 폭격기를 맞은 것 같지만 천천히 한 발 한 발 일어서고 있습니다. 혹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이 있다면, B-52처럼 ‘원 샷’하지 마시고 한 입 한 입, 천천히 음미하고, 다독이며 좀 더 튼튼해질 수 있도록, 자신에게 좀 더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처럼 먼 길을 돌고 돈 끝에 시작해야 될지도 모르니까요. 곧또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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