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는 일은 매번 인내심을 시험한다. 길을 건너라고 먼저 기다려주는 차가 없어서다. '타이밍을 맞춰' 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차들은 쌩쌩 달린다. 집 앞 왕복 2차로에는 무신호 횡단보도가 많지만 보행자를 보고 자발적으로 멈춰서는 차는 드물다. 초등학교 앞 어린이 보호구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분 탓이 아니다. 2021년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서울 종로구 왕복 2차로 무신호 횡단보도에서 횡단하려는 보행자 앞에서 멈추는 차량의 비율을 조사했더니 보행자를 위해 운전자가 정차한 사례는 4.3%에 그쳤다.
법이 바뀌어도 여전하다. 2023년 도로교통법이 개정돼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는 때 자동차는 일시정지할 의무가 생겼다. 횡단보도 근처에서 길을 건너려는 행인이 보일 때 일단 차를 세우지 않으면 승용차 기준 범칙금 6만원, 벌점 10점이 부과된다. 그런데 아는 사람도 드물고, 관행이 바뀔 조짐도 없다.
무신호 횡단보도 앞에서면 매번 고민한다. 저 차를 보낼까, 보내지 말까. 나에겐 먼저 건널 권리가 있지만 저 차가 그걸 알까. 신호등조차 지키지 않는 차량이 많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국 '알아서 조심'하게 된다. 보행자와 차량의 교통사고 뉴스가 뜨면 사람들이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고 서로 당부하는 걸 안다. 그런 걸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도 자가용이 있다. 당근에서 10만원을 주고 산 자전거다. 요가원에 갈 때 주로 타는데, 자전거도로가 없어서 차도로 달린다. 차들은 내게 매섭게 군다. 자전거도로가 없을 때 자전거는 인도가 아닌 차도로 달려야 한다. 항상 맨 오른쪽 차로 끄트머리에서 달리지만 어떤 차들은 클락션을 울린다. 인도로 올라가라는 건지, 빨리 가라는 건지, 천천히 가라는 건지 의도는 알 수 없다. 자전거를 도로의 불청객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그것만은 분명히 전해진다. 차들이 자전거를 탄 사람들을 ‘자라니(자전거+고라니)’라고 부른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자전거를 타고 아무 데서나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차들이 왜 그런지 안다. 자동차가 도로의 주인,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보행자도, 자전거도 느릿느릿한 방해물이다. 그러나 자전거도, 보행자도 교통의 일부이고 차도는 자전거, 자동차, 바이크 모두가 다닐 수 있는 도로다.
게다가 차들은 도로 위 강자다. 치이면 보행자도, 자전거에 탄 사람도 죽거나 다치기 쉽다. 가장 위험한 존재라면 다른 존재들을 배려하며 다녀야 하지 않나. 문명사회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태도라고 생각하는데, 도로의 논리는 다른 것 같다. 가장 위험한 존재가 가장 횡포를 부린다. 차가 없는 곳에서는 자전거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가장 빠른 자전거들이 다른 존재를 방해물 취급하며 자신 밖에 없을 때의 최대 속도로 달리고자 한다. 보행자가 다니는 길목에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보다 느릿한 자전거를 아무때나 아무렇게나 제친다.
고등학교 시절 즐겨보던 미국 드라마 <길모어 걸스>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 로리 길모어는 스타즈 할로우라는 작은 마을에 산다. 마을에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가 하나 있다. 외지인이 거의 없는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서로서로 배려하며 신호를 지킨다. 마을을 부흥시키고 싶어하는 이장은 ‘너무 느린’ 마을의 속도를 개선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횡단보도에 신호등을 설치한다. 일부 주민이 반대하지만 결국 신호등은 세워진다. 주민들은 신호등이 너무 빨리 바뀌고, 보행자 친화적이지 않다고 건의한다. 결국 마을에서 가장 걸음이 느린 한 노인의 속도에 맞춰 보행신호 길이가 바뀐다. 결과적으로 차들이 더 손해를 보게 돼 이장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에피소드가 끝난다.
이 에피소드가 지금까지 기억나는 이유는 부러움 때문인 것 같다. 다니던 고등학교 정문 앞에는 육교가 있었다. 바로 맞은 편에 학교 교재를 파는 서점과 문구점, 근방에 유일한 분식집 등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기 위해선 육교를 건너야 했다. 육교가 꽤 높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종종 육차선 도로를 눈치껏 무단횡단으로 건너곤 했다. 육교 아래는 관할 경찰서에서 붙인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3초 빨리 가려다 30년 일찍 간다’는 식이었다.
흔한 문구였지만, 볼 때마다 부루퉁해졌다. 무단횡단하면 죽어도 된다는 걸까. 안전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차를 향해서 ‘이곳은 횡단보도가 없어 종종 무단횡단하는 학생이 있으니 주의하고 감속하라’고 일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학교와 상가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을 건너는 횡단보도는 학교 정문에서 오른쪽으로는 100m, 왼쪽으로는 200m나 떨어져 있었다. 학생들이 아침에 정문을 닫는 등교시간에 밭게 학교 앞에 도착하는 일은 너무나 흔해서, 지각을 면하려 차도를 뛰어다니는 학생이 많았다. 일 년에 한번씩은 학생들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많은 곳이라는 건, 그곳에 횡단보도가 필요하다는 신호가 아닐까. 보행자를 중심, 그것도 가장 느린 보행자를 중심으로 설계된 스타즈 할로우의 횡단보도가 부러웠던 이유다.
육교는 차 중심으로 설계된 도로의 상징이다. 차는 멈추지 않고 달리고, 보행자는 차를 피해 많은 계단을 올랐다 내려야 한다. 차 중심의 '교통 흐름'을 위해 보행자가 불편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차도 위에 육교를 새로 짓는 곳은 많지 않다. 학교 앞에는 육교를 철거하고 횡단보도를 만들기도 한다. 보행자 중심의 교통을 설계하는 것이 곧 교통사고를 줄이는 길이다.
국내에서도 '무단횡단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한 시도가 성공을 거뒀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교통사고 보행 사망자 수는 꾸준히 감소 중인데, 보행 사망자 중 고령자 비율은 계속 증가 중이다. 전체 보행 사망자 중 65세 이상 고령 보행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2020년 57.5%에서 지난해 67.0%까지 올랐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보행자 920명 중 고령자가 616명에 달했다. 이 중 길을 건너다가 사고를 당한 이들이 346명(56.2%)으로 가장 많았다. 절반 이상이 무단횡단을 하다 사망했다.
유창훈 포천경찰서 경무과장은 남양주 한 파출소에 근무하던 때 별내동 교차로 10곳에 60개의 의자를 설치했다. 유 과장은 노인 수십 명에게 '왜 무단횡단을 하냐'고 물었다. 그리고 가만히 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기 힘든 노인들이 무단횡단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다리가 아파서, 허리가 아파서, 기댈 곳이 없어서 노인들은 빨간 불에도 길을 건넜다. 유 과장은 무단횡단 교통사고가 발생한 곳, 노인이 많이 다니는 곳 등을 중심으로 기둥에 접의식 의자를 설치했다. 실제 노인 교통사고가 줄어들면서 70여 개 자치단체에서 확대 적용됐다. 유 과장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어르신들에게 '무단횡단하지 말라'고 말만 할 게 아니라, 무단횡단을 하지 않을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가 2014년 쓴 한겨레 칼럼을 오래 두고 읽었다. 책 <무명의 말들>에 실린 '신호등 안 지키기'라는 제목의 글이다. 글은 책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에 실린 '아나키스트식 유연체조'의 한 방법으로 무단횡단을 소개한다. "언젠가 정의와 합리의 이름으로 중요한 법을 어기라는 요청을 받게될 때"를 대비해, 합당하지 않은 법을 매일 어기자는 것이다. 저자는 매일의 신호위반이 "어떤 법이 정의롭고 합리적인 것인지 자신의 머리로 직접 판단하는 훈련"이라고 말한다.
어릴 적 나는 왜 '고작 무단횡단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 하시겠습니까' '3초 먼저 가려다 30년 먼저 간다' 같은 표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까. '무단횡단은 불법'이라는 생각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불법을 저지르면 죽어도 되는 걸까. 무단횡단이 사형 선고를 받을 만큼의 중범죄가 아닌 건 분명하다. 게다가 신호위반을 한 차량 운전자가 신호위반을 하지 않은 차량 혹은 운전자와 부딪혀 죽을 확률은 그닥 높지 않을 것 같다. 왜 차량 운전자는 죽지 않는데 보행자는 죽어야 할까. 사회는 왜 보행자가 죽도록 내버려둘까.
정치는 '법 바깥'에 있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법은 바뀐다. 사람이 법을 바꾼다. 어떤 곳에 횡단보도가 있어야 할지, 신호등이 있어야 할지, 자전거도로가 있어야 할지, 스쿨존에서 속도를 위반한 차량에게 얼마나 많은 범칙금을 부과할 것인지. 이 모든 것은 정치의 영역이다.
연재 주기를 전혀 못 지키고 있습니다. 민망하네요..자주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