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하지 않아도 돼

by 오월의개미

친구에게 요가복을 선물받았다. 옅은 하늘색의 민소매 상의다. 마음에 쏙 들어서 매일 입고 매일 빨았다. 곧 문제가 생겼다. 가슴 윗부분이 신축성 있는 소재로 되어있는데 조금 늘어났다. 상체를 숙이는 자세를 할 때마다 가슴팍과 옷 사이가 벌어져서 신경이 쓰였다. 수련 중에도 자꾸만 옷을 끌어내렸다. 계속 입어보려 했지만 점점 손이 가지 않았다.


다른 옷을 입고 요가원에 간 어느 날, 요가원 옆자리 도반이 아끼던 옷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봤다. 색깔만 다른 같은 모델이었는데, 그는 수련 내내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수련이 끝난 뒤 그에게 물었다.


"혹시 이 옷, 가슴 보일까봐 불편하지 않으세요? 저도 같은 게 있는데 좀 늘어나서요. 수선 같은 걸 하셨나요?"


그는 자기는 그런 불편함을 못 느꼈다고, 그러고 보니 상품 리뷰에 나와 같은 부분이 신경쓰인다는 리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상관 없지 않아요?" 그가 말했다.


"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냥 해요. 보는 사람이 이상한 거죠."


뒤에서 다른 도반이 거들었다. "남자들은 웃통 벗고도 운동 하는데 요가복 사이로 가슴 좀 보이면 어떤데?"


"헉 그러네요. 그렇네요." .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몰랐던 것도 아닌데, 친구 일이라면 "뭘 그런 걸 신경쓰냐"고 말해줬을 텐데, 왜 내 일에는 그러지 못했을까. 대화 이후 다시 그 옷을 꺼내 입고 있다.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


친구와 같이 살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냉장고인지 에어컨인지, 집에 고칠 가전제품이 있어서 수리하러 기사님이 오신다고 했다. 친구가 집을 지키고 있기로 하고 나는 외출했는데, 약속된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도 친구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알고 보니 친구는 집 현관문을 열어놓고 기사님께 '저는 너무 졸려서 안방에서 자고 있을 테니 일을 잘 부탁한다. 혹시 필요한 일이 있으면 깨워달라'고 문자를 남긴 뒤 잠을 잤다. 놀랐다. 기사가 나쁜 사람이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수많은 범죄 가능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가 평소 입던 짧은 잠옷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성폭행 당하면 어쩌려고"라고 말할 뻔 했다.


정신을 번쩍 차렸다. 만약 성폭행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내 친구에게 잘못이 있나? 절대 아니다. 여성이 집 문을 열고 자고 있으면 성폭행을 당해도 되나. 그럴 리 없다. 집 문을 잠그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면 성폭행을 안 당하나? 긴 옷을 꽁꽁 싸매고 있으면 성폭행을 안 당하나? 상대방이 악의를 가지면 어떤 일이든 일어난다. 수많은 성범죄 기사에서 피해자에게 '잘못'을 찾으려 했던 반응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그 말들에 동화돼 이런저런 것들을 고민하고 실천했다. 집 현관에 남자 신발을 놔둔다든지, 집에 들어올 때 누구보다 빠르게 문을 닫고 잠기는 것을 확인한다든지, 옷을 갈아입기 전엔 블라인드를 친다든지, 공중화장실이나 낯선 숙소에서는 카메라가 있을 만한 곳이 없는지 확인한다든지. 창문 이중잠금 장치나 탈부착 CCTV를 사는 걸 고민한 적도 있다. 일상이 돼서 몰랐지만 항상 뭔가를 '조심'하고 있었다. 성범죄 사건으로 여성들이 한 명씩 죽어갈 때마다 조심해야 할 것 리스트를 늘릴지 말지 가늠했다. 혼자서 등산로를 거닐지 말아야 할까. 게임에서 친해진 누군가와 오프라인에서는 만나지 말아야 할까. 초인종을 누르는 배달기사에게 답하지 말아야 할까. 나는 왜 그랬을까. 그래야 살기 편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혹여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무고한 피해자가 되기 위해 그랬던 것 같다.


KakaoTalk_Photo_2025-10-19-22-56-25.jpeg 친구랑 살던 집


위험에 둔감한 룸메이트를 둔 덕분에 내가 지레 하고 있던 '조심'들을 돌아봤다. 그 친구가 누리는 '자유'를 보면서, 그 자유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것을 목격하고 느꼈다. 처음엔 샤워 후에 옷을 걸치지 않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친구가 낯설었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여름이면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누구도 그를 비난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건너편 집에서 누군가 벌거벗은 나를 본다고 해도 놀라면 시선을 알아서 돌리면 그만이다. 어떤 음흉한 사람이 나를 본다고 해도 내가 알아채기는 어렵다. 그 사람이 혹여 나를 찍어서 친구들과 돌려보거나 인터넷에 올린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다. 친구 탓이 아니듯이, 내 탓이 아니다. 그걸 알게 되니까, 일상이 가뿐해졌다. 집 안에서 벗고 돌아다닐 자유가 내게 주는 만족감도 컸다.


할머니는 내게 전화를 끊을 때나 집을 나서는 나를 배웅할 때 항상 "조심해"라고 인사하곤 했다. 이유를 다시 더듬어 본다. 할머니는 뭘 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했을까. 그래서 내게도 조심을 당부해야 했을까. 왜 매일의 일상을 칼날을 다루듯 살아야 할까.


조심의 뜻을 찾아봤다.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마음을 씀'이라는 뜻이다. 피해자들은 잘못해서, 실수해서 범죄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성들에게 범죄를 당하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의 조심 말고는 기댈 곳이 없기 때문에, 여성들은 서로 '조심하라'는 말을 인사로도 한다. 헤어질 때 으레 하는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의 목적어는 뭘까.


영화 <경아의 딸>은 딸 연수와 엄마 경아 이야기다. 헤어진 뒤에도 연수에게 집요하게 원치 않는 연락을 해오던 전 남자친구가 온라인에 연수와의 성관계 영상을 유포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연수의 엄마인 경아도 이 영상이 첨부된 문자메시지를 받는다. 영상을 보고 연수를 만난 경아는 연수에게 비난의 말부터 꺼낸다. "어떻게 만나도 그런 놈을 만나냐"고.


경아는 평소 딸에게 '조심, 또 조심'을 당부하는 엄마다. 밤에 택시를 홀로 타서는 안 된다. 집에 남자를 들여서는 안 된다. 잠깐 만나는 동안에도 수많은 주의사항을 늘어놓는다. 스스로에게도 엄격하다. 혼자 사는 집 현관문에는 걸쇠가 세 개다. 퇴근하고 나면 안에서 집 문을 단단히 걸어잠근다. 그런 경아에게 연수가 오래 사귄 남자가 있었고, 그 남자와 단 둘이 집에서 놀기도 했고, 종종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은 마치 연수가 전 남자친구에게 영상을 찍어 유포할 '여지' 혹은 '빌미'를 준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경아는 집 안에서 남편에게 폭력을 당했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집조차 안전한 공간이 되지 못 한다. 가장 친밀한 사람이 폭력을 휘두른다. 철두철미하게 조심한다고 해도 악의는 어떻게든 틈새를 찾아낸다. 혼자 사는 여성이 귀가할 때 문을 닫는 사이 따라 들어와 집 안으로 침입하는 놈들은 어떻게 조심해야 할까. 혼자 사는 여성은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는 걸까. 피해자를 탓하면 끝이 없다. 혼자 살면 '혼자 살아서', 같이 살면 '하필 그런 놈이랑 같이 살아서' 봉변을 당한다.


그러니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기로 한다. 자신에게도, 친구에게도, 뉴스 속 누군가에게도. 조심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머리로 알아도 삶에 적용하는 건 또 다른 단계다. 앎과 실천이 불화하는 일들이 인지도 없이 지나간다. 나도 모르는 새 내 삶을 얽매고, 주변 사람을 옥죈다.


common.jpeg 영화 <경아의 딸>의 경아(김정영).



누가 부끄러워야 하나요


주변에서 가장 흔한 성폭력은 직장 내 성희롱, 스토킹, 스텔싱, 교제폭력, 불법촬영 같은 것들이다. 심심찮게 소식이 들려오기도 하고, 내 주변 여성들은 일상에서 이 모든 일을 '조심'하도록 교육받는다.


특히 불법촬영에 대한 경각심이 엄청나다. 한 친구는 한국에 코로나19가 처음 유행하던 시절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코로나 때문에 딱 하나 좋은 점이 있는데, 마스크를 항상 끼니까 공중화장실 가기가 편해졌다는 거라고. 공중화장실에 가면, 여성 칸이라면 어디서든 틈새에 박혀있는 휴지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틈새에 카메라를 설치할 수 있단 생각에 이용자들이 구멍을 막아둔 거다. 다니던 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도, 친구 직장 여성화장실에서도 카메라가 발견된 적이 있다.


모텔이나 에어비앤비 같은 여행 숙소에 가서도 '몰래카메라 탐지 어플'을 켜고 카메라를 찾아보던 때가 있다.


불법촬영은 피해자의 '수치'로 완성되는 범죄다. 불법촬영 대상이 어떻게 자신이 불법촬영물에 등장하는 걸 알게되는지 궁금했던 때가 있다. 내가 화장실이나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촬영됐다고 해도 나는 절대 모를 것 같아서다. 피해자들은 지인을 통해서 '이거 너 아니냐'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고 한다. 좀 의아하다. 불법촬영물을 '본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내가 네가 나오는 영상을 봤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왜 수치심은 불법촬영물을 본 사람의 몫이 아니라 찍힌 사람의 몫인 건지. 거꾸로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지 말이다.


불법촬영물은 협박수단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는 것도, 집 안에서 옷을 벗는 것도, 누군가와 성관계를 한 것도, 성관계 영상을 자발적으로 찍은 것도 강제로 찍힌 것도 뭐 하나 부끄러울 일이 못 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여성을 "영상을 유포하겠다"며 겁박한다. 영상을 유포하면 '나락 가는' 건 가해자여야 하는데, 영상은 오히려 가해자의 무기가 된다.


사회가 가해자의 논리에 동조하고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 테이프'의 주인공이 됐던 유명인들이 오랫동안 방송에 나오지 못한 시기를 알고 있다. 성관계 동영상이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던 건, 그 테이프가 공개된 뒤 사람들이 그 테이프를 돌려봤기 때문이고, 피해자를 비난했기 때문이다. 테이프를 돌려보는 것을 엄격하게 처벌했다면, 그 테이프 속 피해자를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았다면 협박은 성립할 수 없었을 거다.


친구와 함께 살다 나온 집에는 창문에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달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 그렇게 생각하는 연습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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