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모른다.
영화 <너에게 가는 길>에는 성소수자의 부모인 비비안과 나비가 나온다. 어느 날 비비안의 아들이 커밍아웃한다. '엄마 아빠, 저는 동성애자예요'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식탁에 두고 떠났다. 비비안은 나흘 넘게 밥도 삼키지 못하고 울었다. 비비안은 승무원이다. 국경을 넘으며 게이 커플, 레즈비언 커플을 많이 봤다고 그는 말한다. 며칠 뒤 아들을 불러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들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는 게이 아들을 뒀다'고 말하기까지는 그후로 몇 년이 걸렸다. 머리로 아는 것과 곁에 두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나와 다른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만나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취재원과 지속적으로 만나는 일은 드물고, 잠깐 그의 이야기 속에 빠졌다가도 금세 다른 이야기를 찾아가게 된다. 이전의 일은 잊힌다. 몇 개월 전의 기사를 읽다보면, 이게 내가 쓴 기사가 맞나 싶을 때도 있다. 내가 아는 것, 들은 것, 그럴 듯하게 말하고 쓴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노년 노동 역시 그런 주제다. 기자가 되던 해 5월, 서울 강북구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노동자 고 최희석씨가 입주민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민들이 경비노동자들에게 갑질을 하는 일은 유래가 깊다. 경비노동자가 이로 인해 사망하는 일도 잊을만 하면 일어난다. 아파트의 보급이 본격화된 1980년대부터 경비노동자를 향한 차별과 멸시는 끈덕지게 이어졌다. 최희석씨는 몇 주간 입주민의 폭행과 폭언에 시달렸다. 일을 그만두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는 협박도 당했다. 그는 "더는 나와 같은 사람이 없게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가해자는 결국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을 확정받았다.
이듬해 여성의날에는 6411 첫차를 타고 여성 청소노동자들을 만났다. 아직 찬 바람이 부는 3월이었다. 오전 4시 차를 타기 위해서는 3시엔 일어나야 했다. 그 일을 매일 해내는 사람들이 구로에서 여의도를 지나 강남까지 버스를 차곡차곡 채웠다. 그 차를 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솔직히 말하면 여의도에서 내리기 직전엔 버스가 터지는 줄 알았다. 급하게 내리려던 정류장에서 내리지 못해서 승객들을 웃기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서로 사정에 훤했다. 어느 정류장에서 몇 명이 타는지, 그들은 어디서 내리고 또 무슨 일을 하는지. 청소노동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최저임금을 받지 못해도, 제대로 된 휴게 공간이 없어도 '괜찮다'. 이 나이에 일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가까스로 여의도역에 내렸을 때 이들이 탄 버스가 6411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오전 5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 안양ㆍ양천ㆍ중랑ㆍ청량리 등에서 출발한 버스가 사람들을 토해냈다. 노년의 노동자들이 잰 걸음으로 신호등을 건너 빌딩 숲으로 흩어졌다.
몇 개월 뒤 대기업 상장사의 여성 임원 비율과 성별임금격차를 다룬 기획기사 <유리천장 박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을 땐 이들의 이야기가 다뤄지지 않는 게 못내 아쉬웠다. 무엇이 여성노동의 현실인가. 여성 임원이 단 한 명도 없는 상장사가 63.7%에 달한다는 것, 전체 여성 임원 비율은 2%에 불과하다는 것, 상장사에 다니는 여성 노동자가 남성보다 연봉이 1562만원 적다는 것도 참담한 일이다. 그런데 어쩐지 먼 나라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장사에 다니는 여성 임원보다 요양보호사나 청소노동자가 되는 것이 나와 더 가까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상장사에 다니는 정규직 여성 노동자와 요양보호사나 청소노동자, 마트 노동자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취지의 기사 한 꼭지를 기획에 끼워넣었다. 경력단절 이후 여성노동자, 노년의 여성노동자들은 '달리 갈 데가 없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래 다녀도 월급이 똑같은, 숙련돼도 진급이 없는 직종에 종사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기는 동안, 내가 이들과 다른 처지에 있다는 점과 영영 다른 처지에 있고 싶다는 점을 애써 무시했던 것 같다. 상장사에 다니는 여성노동자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요양보호사와 청소노동자, 마트 노동자는 노조를 통해 섭외해야 했다. 그게 내가 서 있는 자리이자 지키고 싶은 자리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멀리서 들을 수 있는' 자리 말이다. 얼마 전 퇴직한 아빠가 "경비 일이라도 해볼까?" 했을 때 감정이 요동친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적 아빠의 이미지는 '회사원'이다. 양복 입고 을지로로, 대치동으로 이른 아침 출근해 늦은 밤 돌아왔다. 그렇게 30년 넘게 일하다 1년 전 일을 그만뒀다. 해가 긴 계절이 지나는 동안 산으로 들로 다니던 아빠는 겨울을 맞아 다시 취업을 준비한다. 얼마 전 아빠에게 "아빠, 이 담에 뭐할 거야?"라고 묻자 아빠는 주택관리사 시험을 쳐볼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엄마에게 묻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려면 쳐야하는 시험이라고 했다. 안 되면 경비 '일이라도' 하지 뭐, 라는 아빠를 보며 아빠가 보험사 현 임직원 혹은 전 임직원을 거쳐 이제 전혀 다른 것으로 불리게 되겠구나, 실감했다. '그런 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그런 일'이란 무엇인가. 내가 듣고 써 온 이야기의 주인공들이다. 수없이 들은 이야기 속 피해자다. 얼마 전 엄마에게서도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가족이 오랜 기간 살아온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이다. 첼로학원을 다녀온 초등학생이 경비실에 첼로를 맡기려고 했다. 다음 학원을 가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경비노동자는 비싼 물건을 맡아주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며 집에 악기를 놓고 가라고 했다. 나중에 아이 아빠가 경비실에 내려와 고성으로 폭언을 했다. 그 시간 집에 있던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잠깐인데 애 부탁 하나 못 들어주냐, 내가 너 자르고 만다고 소리를 질렀다. 나중엔 관리사무소에 찾아가고, 입주자대표회의에서도 그 노동자를 자르라고 민원을 한 모양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가해자는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별 미친 놈이 다 있네,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뭐 잘났다고 남한테 갑질이래, 꼭 회사에서 가정에서 자아가 말라비틀어져 한 마디도 못하는 놈들이 쥐꼬리만한 권력만 생기면 노동자들한테 갑질하지…. 그렇게 반응하며 나는 아마 피식피식 웃었다. 그런데 아빠가 미래에 그 무례한 남성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생기니까 도무지 웃음이 나지 않았다. 벌써부터 그 사람이 몇 층 몇 호에 사는지 알아내 찾아가고 싶어졌다.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얼마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아파트 내에서 나무 가지치기를 너무 심하게 한다는 제보를 듣고 서울의 한 대단지 아파트를 찾아갔다. 많은 지자체가 차차 가로수의 강한 가지치기를 금지해 가는 추세지만, 아파트 내부 등 사유지는 별도로 제한하지 않는다. 제보를 받은 A아파트는 플라타너스와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이 어우러진 도시 숲을 자랑하는 아파트였지만 강한 가지치기가 시작되면서 나무마다 3분의1 이상이 잘려나가고 있었다. 관리사무소에 찾아가 소장에게 강한 가지치기를 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나무가 너무 우거져서 저층 세대에 벌레가 날아든다는 민원이 잦다. 지난 겨울엔 폭설이 내려 나뭇가지가 주차된 차량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관리비로 몇 번이나 차량수리비를 물어줘야 했다. 결국 민원이 많이 들어와 자르게 됐고, 몇 년에 한번씩은 원래 이렇게 자르는 게 관행이다...그런 설명을 듣고 있을 때 한 주민이 사무소에 들어와서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무를 이렇게 베어내면 어떡하냐, 우리 아파트가 얼마나 예뻤는데 동의는 받고 자르시는 거냐, 새들은 어디 가서 살라는 거냐…. 소장은 내게 양해를 구하고 주민을 설득해 어렵게 내보냈다. 그땐 그 주민을 남몰래 응원했다. 그런데 이제 돌아가서 그 사람에게 조금은 설명하고 싶어졌다. 조용히 말해도 다 들린다고. 소장도 나무를 괴롭히고 싶어서 자르는 게 아니라 민원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라고….
일상에서 만나는 노동자들을 존중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서비스직 노동자를 하대하는 사람들에 경악하고, 노년의 노동자를 그림자 취급하는 사람들을 미워했다. 콜센터에 전화할 때 나오는, ‘수화기 너머의 직원도 누군가의 가족입니다’라는 식의 문구가 싫었다. 누군가의 가족이 아니면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거야? 가족이라고까지 상상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존중하지 못하는 거야? 싶어서. 그런데 이제 그런 광고 문구의 거친 표현과 별개로, 떠올릴 얼굴이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놓는 것임을 알게 됐다. 난 이제 노년의 비정규 노동자를 보면 엄마와 아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다. 가까운 사람의 정체성과 경험이, 눈을 마주친 사람들이 나누어준 이야기가 나를 재구성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나면 관심사나 기사 쓰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들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고, 그들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장애, 성정체성, 빈곤 등 주제를 전보다 조심스럽게 다루게 된 것처럼 이제는 부모 때문에 노년 노동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다시 처음의 영화 얘기로 돌아가고 싶다. 자녀의 커밍아웃 이후 비비안과 나비는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성소수자부모모임에 참석하고, 퀴어퍼레이드에 나가 성소수자들을 껴안으면서. '내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힘들까'를 생각하며 시작한 여정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가끔은 세상과 뭇사람을 향한 막연한 연대나 사명감보다 한 사람의 얼굴이 더 빠르고 강력하게 사람의 세계를 바꾼다. 내 가족/친구의 힘듦을 덜어주고 싶어서, 함께 하고 싶어서, 부끄럽고 싶지 않아서, 누가 되지 않으려고, 혹은 그 사람을 떠올리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한 말과 행동이, 그 용기가 결국 내게 '체화'된다. 세상도 조금씩 바뀌겠지만 가장 많이 변하고 배우는 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