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건 할아버지 생각이었다. 할아버지는 지방정부 공보실에서 일한 적 있다. 그 시절 기자들은 공보실 직원들을 꽤나 괴롭혔을 것 같은데도 할아버지는 내게 기자는 멋진 직업이라고, 네게 기자가 잘 어울린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기자들은 뒷주머니가 빵빵한 술고래들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 헤매고 부끄러움 앞에서 펜을 놓는 이들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여자인 내게 그런 마초적인 직업이 잘 어울리겠다고 점지한 것 자체가 내겐 기쁜 일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게 됐을 때, 할아버지가 스치듯 말했던 기자가 후보에 올랐다. 미디어가 묘사하는 기자의 모습은 대체로 비열하고 뻔뻔하지만, 할아버지가 봤던 것처럼 뭔가 긍정적인 면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도 그런 '멋진 기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마음으로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몇 년 뒤 경향신문 기자가 되자, 할아버지는 수십 년을 읽던 조선일보를 두고 우리 회사 신문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노무현이 아니라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던 할아버지. 내가 쓴 트랜스젠더 인권 기사가 1면에 실린 날, 그로부터 "잘 읽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성별 정체성, 트랜스여성, 트랜스남성 같은 단어 사이에서 헤매다 끝내 갈피를 잡아가는 할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할아버지 앞에서는 언급도 하지 않던 나의 사상과 생활이 종이신문을 타고 할아버지에게 가닿는 과정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쓰는 기사는 내 트랜스젠더 친구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아야 했지만 동시에 할아버지도 이해할 수 있는 글이어야 했다.
얼마 뒤 독자서비스국에 연락해 할아버지가 사는 집의 경향신문 구독을 끊었다. 할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엄마 집에서 지내게 됐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거실 침상에 누워있었다. 정신은 또렷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할머니와 엄마가 그를 간병했다.
TV를 향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오랜 시간을 보내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한다. 대부분의 관계를 저멀리 두고 온 사람. 좋아하던 낚시나 골프를 하러 나서기 어려워진 사람. 내가 먹여살리던 이들이 이제 당신을 입히고 먹이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는 사람이었데 점점 웃음이 줄었다. 할아버지가 두 번 웃은 기억이 난다. 내가 칸영화제에 가서 쓴 기사가 매일 보던 종편 아침 방송에서 소개됐을 때(박찬욱 감독과 송강호 배우께 감사). 그리고 내가 칸영화제에 다녀온 뒤 출근하자 한 부서 선배가 "마카롱 같은 거 안 사왔냐"고 물었고 내가 "여비 주셨어요?"라고 대꾸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 전자는 자랑스러웠을 거고 후자는 어이가 없었겠지만, 어쨌든 할아버지가 웃었다.
몇 번의 계절이 더 지난 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처음 치르는 가까운 이의 장례였는데, 장례라는 형식 앞에 덜컥 겁이 났다. 엄마는 사랑받은 딸, 나는 사랑받은 맞손녀였지만 이 가부장적인 의례 속에서 우리가 뒤로 밀려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엄마와 나를 남성 형제들과 차별하지 않았다고 해서 장례가 그럴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남성 어른 위주로 흘러가는 절차 속에서 사랑하는 할아버지와 아빠를 잃고 슬퍼 마땅해야 할 우리가 '여자라고 무시하지 마세요'를 외칠 수 있을까. 가족들이 유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가수 이랑이 언니의 장례식에서 상주를 한 이야기가 화제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지만 어쩐지 막상 내 일이 되니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짧은 걱정이 무색하게도 장례를 치르는 광주로 향하는 길에 엄마는 내게 상주 순서를 자신이 말하는 순서대로 입력하라고 지시했다.
배우자: 할머니
자녀: 엄마, 이모, 삼촌(나이순)
사위: 아빠, 이모부
며느리: 외숙모
손: 나, 동생, 사촌동생 1, 2, 3, 4 (나이순)
가만히 뒀으면 이렇게 입력됐을 거다.
자: 삼촌
녀: 엄마, 이모
사위: 아빠, 이모부
며느리: 외숙모
손: 사촌동생 3, 4, 나, 동생, 사촌동생, 1, 2(아들의 자식들-딸의 자식들 순)
부인: 할머니
엄마는 할아버지를 오랫동안 돌봐온 할머니를 상주 목록 맨 마지막에 오도록 가만둘 수 없다고 했다. 해외생활을 오래 한 막내 삼촌보다, 아버지를 곁에 둔 맞딸인 자신이 뒤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상주 목록 변경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장례식장 사무실에 가서 말하니까 바로 바꿔줬다. 엄마는 손녀들이 빈소에서 손님을 맞고, 손자들은 상을 차리게 했다. 누구도 시비걸지 않았고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남자-여자의 순서만 해체하고 나이의 순서는 그대로 두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내게 '가볍지만은 않은' 사랑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아있는 할아버지를 사랑했던 것만큼, 죽은 할아버지를 위해서도 해야하고 할 수 있는 몫이 있다고. 할아버지를 애도하고 할머니와 엄마를 위로하는 데 있어서 내가 뒤로 물러날 필요가 없다고. 의례 앞에서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 않아도 사랑하고 애도할 수 있다고.
어떤 가격대의 수의를 입힐 건지 상조회사 직원이 묻자 할머니는 수의가 필요없다고 했다. 준비해둔 옷이 있다. 할아버지에게 맞춘 양복이었다. 할아버지에게 (할머니 생각에) 제일 잘 어울리던 넥타이를 매고, 몸에 딱 맞는 양복을 입고, 내가 선물한 '삭스어필' 양말을 신고 할아버지는 화장터로 향했다. 내가 영정을 들었다. 할아버지가 이 막무가내의 장례식을 보고 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장례를 마치며 나는 아마 할아버지가 허허 웃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엄마네 가족보다 아빠네 가족은 가부장적인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미아리 할머니댁에 가면 남자와 여자는 다른 상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유난히 동생을 예뻐했는데 그가 장손이었기 때문이다. 동생에게 잘해주라는 말을 밥 먹듯 하는 할머니 때문에 억울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은 것은 다행인 일이다. 할머니에게 인정받고 싶다기 보다 그냥 할머니랑 친하게 지내기 싫었다. 안 그래도 어렸을 때 엄마가 할머니 때문에 울던 장면이 기억나 찜찜했던 차였다. 오남매 중 네 번째 자식인 아빠, 아빠의 자식 중에서도 둘째. 나이로는 손주들 중에 가장 어린 데다 다소 아방한 캐릭터를 가진 동생이 집안을 책임질 기둥이 될 거라는 가부장식 계산법이 조금 웃기고 안쓰럽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할머니만 그런 건 아니고 아빠네 식구들은 그런 분위기에 장단을 맞췄다. 할머니가 카리스마 있는 편이긴 했지만 여자들만 일하고 남자들은 고스톱 치며 앉은 자리에서 밥 먹고 술 마시고 과일 먹고 고스톱 치는 문화가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클수록 아빠 형제들이 쥐어주는 용돈만으로는 그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워서 미아리 할머니 집을 멀리 했다.
미아리 할머니가 몇 년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광주 할아버지 장례와 달리 미아리 할머니 장례식에서는 아무런 욕심이 나지 않았다. 이 집안의 대소사가 그랬듯 또 나를 뒤에 두고 일들이 흘러가겠거니 싶었다. 불리는 대로 일하다 며칠이 지났다. 할머니도 나를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했을까.
지난 설에는 광주만 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살던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다. 이번 설에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롓상을 차렸다. 할아버지 사진만 놓았는데 차롓상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제사 시간도 날짜도 놓는 음식도 할머니 마음대로다. 점점 음식 가짓수가 많아지는 것 같다고, 엄마는 그만 고생하시라고 자기 엄마를 타박했다. 그러면서 제삿날 가족들끼리 모여서 고인 장점 세 가지씩 말하기, 고인과의 추억 세 가지씩 말하기를 하는 어느 가족들 이야기를 했다. 음식보단 추억이라고. 세 가진 너무 많으니까 우리는 할아버지와 추억을 딱 한 가지씩 말하기로 했다. 한 가지씩 말하는 동안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빠는 할아버지가 아빠와 바둑을 둘 때 절대 져주지 않았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 얘기를 듣더니, 할아버지가 군대에서 많이 맞았는데 그게 장군들한테 바둑을 안 져줘서였다고 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상무 축구단에서 일할 때 기성용 싸인볼을 받아다준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우리가 할아버지 덕에 몇 번의 축구 경기를 VIP석에서 봤던 게 좋지 않았냐고 했다. 나는 "풋살하는 지금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땐 축구 규칙도 잘 몰랐다. 아쉽다"고 했더니 엄마가 다시 "원래 그렇게 타이밍이란 게 안 맞는 거야. 그냥 이야기가 흐르고 흐르는 거야"라고 했다. 엄마는 아빠랑 엄마가 죽으면 나랑 동생이랑 일 년에 두 번 만나서 밥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 아빠 생일이든, 엄마 아빠 제삿날이든 정해서 얼굴을 봤으면 좋겠다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
밥을 먹다 문득 미아리 할머니 차례는 지냈나 궁금했다. 아빠한테 물으니 큰댁에서 지낼 거랜다. 그러고보니 모르겠다고. 할머니는 여자니까. 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같은 선친들과 함께 할머니가 차롓상에 올랐을지 모르겠다고. 그러니까...큰댁에서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었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명절 당일 아침 부지런히 차롓상을 차리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누가 효자네 누가 장남이네 장손이네 하던 집안 사람들이 어머니가 차롓상에 오르는지 안 오르는지 우두커니 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화가 났다. 하지만 그 역시 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설 나는 또 생각했다. 정해진 대로 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 앞에서 우리의 사랑과 애도는 무력하고 헛되어지는지. 엄마아빠를 그리워할 날을 상상하면서 나는 제멋대로의 사랑을 하리라고 다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