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음에 관하여(2019)

정반합 또 정반합 또 정반합

by 비호

황무지.

살려달라 애원하는 한 남자.

그의 옆에는 뚜껑 열린 관이 덩그러니 있다.

군인들에 의해 손발이 묶이고 총살형에 처해지기 일보 직전.

왠지 도움의 손길을, 최소한 마지막 기도라도 올려줄 것 같던 군종은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그는 카메라를 보며 '제발... 안돼...'라며 울먹인다.


어느 노천카페.

라라라...

살랑살랑 몸을 움직이게 만드는 음악.

한무리의 젊은 아가씨들이 언덕을 내려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탭댄스를 기반으로 조금씩 조금씩 춤 동작이 커진다.

해군 제복을 입고 담소를 나누던 젊은이들은 아가씨들을 바라본다.

노천 테이블의 부부도 그 아가씨들의 춤을 바라본다.

음식점 안에 있던 사람들도 밖으로 나와 아가씨들의 춤을 바라본다.

음악이 끝나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은 아가씨들은 무대 인사처럼 정중히 답례한다.


역 대합실.

유모차를 가지고 있는, 아마도 방금 갓난 아이를 출산했을 것 같은

젊은 여인.

한 쪽 구두 뒷굽이 부러졌다.

절룩거리며 의자로 가 자리에 앉아 어떻게 할까 고민한다.

젊은 여인은 결국 나머지 구두도 벗어, 유모차 바구니에 넣고 맨발로 일어나 유모차를 끌고 간다.

언뜻 보이는 유모차 안 아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집 안.

아마도 가문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딸을 칼로 찔러 살해한 것 같은

남자가

금세 후회하며 죽은 딸을 껴안고 비통하게 울고 있다.

문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어떤 남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듯 그 남녀를 쳐다보는 남자,

그러나 그들은 그저 문밖에서 그 장면을 안타까운 듯 냉정하게 바라볼 뿐이다.


마켓.

생선을 칼로 손질하는 상점 점원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

과일 코너에서 과일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이것저것 파는 마켓에서 화면에 가장 크게 잡힌 건 수산물 상점이다.

수산물 진열대에는 유독 입을 크게 벌리고 죽어 있는 커다란 생선 한 마리가 있다.

무리의 사람들 중 중년의 남자가 "할 말 없냐"라는 듯 갑자기 중년의 여자 뺨을 때린다.

그리고 또 때린다.

무리의 사람들이 이 남자를 말린다.

제압당한 남자는 울먹이듯 여자에게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거 모르냐고...

여자는 안다고 말한다...


방 안.

젊은 남녀 커플이 앉아 있다.

여자는 반복적으로 머리를 천천히 빗고 있고,

남자는 책을 읽고 있다.

남자는 열역학 제1원칙에 대해 말한다.

"세상 모든 건 에너지고 절대 파괴되지 않는다. 에너지는 하나에서 새로운 다른 것으로 변하면서 계속 이어져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에너지는 새로운 것으로 계속 변하며 끊임없이 지속된다."

그러면서 남자는 매우 진지하게

너의 에너지가 백만 년 후엔 새로운 것으로 변해 어쩌면 감자가 될 수도 있고, 토마토가 될 수도 있다는 예시를 들어 설명해 준다.

여자는 건조하게 감자보단 토마토가 좋겠다고 말한다.

남자는 다시 책을 읽고 여자는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빗는다.



영화는 이렇게 매 장면 다른 인물 (물론 중복돼서 나오는 인물들도 있긴 하다.) 다른 설정, 다른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장면들은 남자가 설명한 열역학 에너지 법칙처럼

어떤 에너지가 새로운 에너지로 변하고 또 변하고 그렇게 끝임없이 변하면서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위의 영화 일부 내용 예시에서 보듯.

총살을 앞둔 남자의 울먹임은 젊은 아가씨들의 흥겨운 콧소리와 흥얼거림으로 바뀐다.

총살을 진행할 군인들은 다른 세대 다른 모습의 군인들로 바뀐다.

즐겁게 발을 구르며 춤을 추던 아가씨의 신발은 갓 출산을 한듯한 젊은 여인의 부러진 구두 뒷굽으로 전환되고,유모차 안 보이지 않던 아기는 아버지에 의해 명예 살인된 어린 딸로 바뀐다.

후회하며 통곡하는 아버지의 입은 수산물 코너

입을 크게 벌리고 죽어 진열된 생선이 되고,

그 아버지가 사용했던 칼은

생선의 배를 가르는 수산물 상점 직원의 칼이 된다.

내가 사랑하는 걸 왜 모르냐며 여자를 때렸던 중년의 남성은

책을 읽는 젊은 남자가 되고,

나도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걸 안다고 말한 중년의 여자는

건조하게 머리 빗는 젊은 여자가 된다.

그 젊은 남녀가 있던 방 안 창밖을 향하고 있던 망원경은

훨씬 예전 히틀러 지하 벙커의 내려놓은 전화 수화기와 음악이 끝나 지지직거리는 턴테이블이 되고,

세계 정복의 야망의 허탈한 끝을 예감하고 있는 히틀러는

버스 정류장에 정차 중인 버스 안에서 홀로 울먹이며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남자가 된다.



단절과 아이러니

버스 정류장에 정차 중인 버스 안에서 혼자 울먹이던 남자가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버스 안 사람들에게 말한다. 버스 안 사람들은 별반 반응이 없다. 버스 안 다른 남자가 결국 "집에서 울지 왜 여기서 울고 자빠지고 있냐..."고 말한다. 맞다. 그런데 바로 전 장면이 지하벙커에서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는 히틀러와 그 무리들이었다. 자신의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해 대국민 프로파간다로 선동했던,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설파했던 히틀러였다는데

이 영화의 변증법적 아이러니가 있다.


믿음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을 알려줘야만 할 것 같은 신부는 그 답을

노쇠한 의사에게 구하려 하지만

의사는 버스 시간 놓친다며 그 신부의 절박함에 무덤덤하다.


젊은 미용사는 미용실 밖 화분 속 메말라 죽어가고 있는 식물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 준다. 푸석하게 풀어 헤쳐진 손님의 머리를 자르기 전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는 장면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영화 속 거의 대부분의 캐릭터는 별말이 없다. 두 명이 나와도 대화라고 할 만한 것조차 없다. 그저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하며 생각하고만 있을 뿐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푹 빠졌다. 샴페인을 정성스레 여자의 잔에 따른다. 남자는 여자를 지긋이 바라본다. 여자는 샴페인을 마신다. 그리고 또 마신다. 여자는 샴페인을 좋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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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테이스팅을 기다리는 웨이터는 상관없다는 듯 신문을 읽고 있는 손님.

한참 후 와인을 천천히 마시고 좋다는 말을 할때

웨이터는 넘치는 줄도 모르고 와인을 하염없이 따른다.


대화는 없고, 사실 그 대화의 필요성도 없을 만큼 모든 것은 단절돼있다.




창백한 얼굴들

그래서일까?

영화의 모든 배우들은 필요 이상으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도움을 청해도 혹은 호소해도 (이러한 호소장면에서 배우들은 의도적으로 카메라를 응시한다.)

속 시원한 슈퍼 히어로도 없으며,

하다못해 실컷 울라며 빌려줄 어깨조차 없다.

전쟁에서 전사한 젊은 아들의 무덤에

아무리 물을 주고

꽃을 주고

매일 너를 생각한다 말해줘도

돌아오는 건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생기 없는 얼굴로 화면 곳곳에 등장한다.

끊임없이 삐거덕 거리며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다 이내 길을 잃고 헤매다 짜증 낼 뿐이다.

벌써 9월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철새들만이 명확하게 그들의 길을 가는 듯하다.

그 철새들은 건조하게 앉아 있는 공원 벤치 커플 하늘 위로 날아가고,

손쓸 방법 없이 퍼져버린 자동차를 보며 아무것도 없는 길 위에서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중년 남자 위로 날아간다.



Snobbish

윤여정 배우가 <미나리>로 상을 받고 한 수상소감에서 사용한 단어.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이라는 뜻의 snobbish.

영화뿐 아니라 문학, 미술, 음악 등에서 타 문화권보다 더 우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유럽 사람들.

정말 더 우월한지 아닌지를 떠나,

할리우드의 상업적 접근에 지금은 많이 밀렸지만,

영화 공부한다는 사람치고 유럽권 영화를 분석해보지 않은 사람 없을 만큼,

유럽 영화들의 정체성은 오래됐고 다양하며 뚜렷하다.

그로 인해 유럽에선 이런 영화들이 종종 나온다.

한 번 더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쉽게 한 번 더 봐야겠다 결심하기는 좀 망설여지는 그런 영화 말이다.




그림 같은 사진, 사진 같은 그림

이 영화는 정말 모든 장면이 다 그림 같고 사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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