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서 비논리적인
어머니(신신애)는 이불을 뒤척여 보지만 리모컨을 찾을 수 없다.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TV 가까이로 다가가 버튼을 천천히 꾹-꾹- 누른다.
아들(기태, 이동휘)은 냉장고를 열어본다.
먹을 것 없는 냉장고 안에 리모컨이 아무렇지 않게 들어 있다.
애매하게 열린 안방 문안에는 어머니가 있으리라.
아들은 방 안도, 방 밖도 아닌 애매한 곳에 리모컨을 슬며시 놓아둔다.
어머니는 해외 거주의 꿈을 뒤로한 채 요양병원으로 입원한다.
홀로 남겨진 아들이 어머니 말씀에 따라 밥을 차려 먹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연다.
냉장고 안에 제자리인 양
떡하니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리모컨.
리모컨을 들고 아들은 텅 빈 안방으로 들어간다.
리모컨으로 TV을 틀어보려 하지만,
리모컨은 작동하지 않는다. 아마도 배터리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던 것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이런 비슷한 감정선이 있었다.
죽음을 앞둔 아들이 홀로 남겨질 아버지에게 비디오 작동법을 알려주던 그 장면.
세상은 언제나 생각보다 빨리 변한다. 그리고 예상보다 일찍 끝난다.
동창생 여자 (영은, 이상희)는 기태처럼 벌교가 고향이다. 억척스럽게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서울 인' 드림을 꿈꾸는 영은.
영은이 커피숍에서 일하고 있을 때
기태에게
커피숍 저쪽에 앉아있는 남녀 커플 손님에 대해 은밀히 얘기한다.
화두는 불륜이 의심된다는 것.
저렇게 둘이 앉아 있다 남자가 먼저 나가고 좀 있다 여자가 나간다는 이유에서다.
기태의 친구는 서울, 대학, 성공에 대한 로망이 있다.
'서울'과 '대학'은 가져볼 기회가 없었기에 '성공'은 꼭 잡고 싶어 한다.
그래서 친구는 기태를 동네 럭셔리 술집으로 불러 근사하게 대접하는 척하다
'서울', '대학'을 가져봤었던 기태에게
비아냥 한 사발을 매긴다.
밥집에서 기태는 국도극장 실장님(이한위)과 느릿하게 점심을 먹고 있었다.
때마침 성공을 꼭 잡고 싶어 하는 기태의 친구가 멋지게 정장을 차려입고 밥집에 들렀다.
굳이 묻지 않는데 기태의 친구는 "고객님 차를 딜리버리하고 나서 밥 먹으러 아내와 왔다."고 한다.
굳이 물을 이유도 없었지만 기태의 친구는 "서울에서 왔다."며 아내를 재차 소개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의 아내는 기태가 며칠 전 봤었던
커피숍 불륜 커플 바로 그 여자다.
서울은 말이 없고 기태의 경험에 의하면 무섭고 외로웠던 곳이다.
그 외로운 곳을 벗어나 벌교로 온 그 서울 여자는
영화 속에서 어디에서도
단 한마디 말이 없다.
가족에 대한 얘기, 본인에 대한 얘기 하기를 극구 외면하던 국도극장 실장은
동네 강아지를 사람 이름 부르듯 불러 주고,
기태에게 매표 부장, 아니 영업부장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정작 본인은 실장이 남부끄럽고 그냥 오 씨라 부르라 했지만,
기태는 실땅님~~ 을 시전 한다.
어느샌가 보도블록 틈을 뚫고 자란 이름 모를 들꽃의 이름을 궁금해하기도 한다.
유독 영화에서는 서로 간의 이름을 자주 불러 준다.
야!
너!
가 아닌 서로 간의 이름을...
하다못해 얼굴은커녕 목소리조차 등장하지 않는 배역
(국도극장 영사기를 돌리는 사람과 취업자리 알아봐 주는 후배일듯한 사람)에게까지도
그들의 직함 또는 이름으로 자주 부른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거창한 김춘수의 꽃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서는 누구에 대한 확인이며, 애정이다.
누구라는 그 존재를
되새기고 기억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영화는 오래된 것, 혹은 오랫동안 있어 익숙하다는 이유로 등한시 됐던 것들로 화면 곳곳을 채운다.
요양병원 입원을 앞둔 날 유람선을 타고 유람하는 기태와 어머니는 별반 말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름답게 출렁이는 물살과 햇살에 그림자가 뉘엿 넘어가는 저녁을 말없이 기억한다.
술 취한 기태와 영은이 앉아 있던 커피숍 그 밤에는
빗줄기가 창문 넘어 어렴풋이 또로록 굴러 떨어진다.
고등어는 항상 조금은 탄 것 같고, 그래서 혼자 밥을 먹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오래돼 익숙한 것을 붙잡고 그것에 삶의 논리 정연을 재단질 하고자 하는 기태의 모습은
그래서 또한 익숙하다.
그리고
그래서 국도극장 실장님의 삶이 그렇게 논리적이지 않다는 말이 더욱 가슴 아프다.
우리가 익숙해 잘 알고 있지만, 놓쳤던 혹은 외면했던 그런 것들이 가득한 영화다.
<흐르는 강물처럼> 어찌하다 보니 고향으로 오게 된 기태는
<첨밀밀>처럼 영은에게 설렘과 편안함을 느낀다.
<박하사탕>처럼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다 외칠 곳이 어디인지,
그 순수했던 노스탤지어가 어디인지 모르겠는
상황에서
결국 남은 건
<영웅본색>처럼 담배 피워 물고 마음속 의리, 어쩌면 기태에겐 고향 혹은 국도극장일지도 모를
그 의리만 남는다.
아무리 봐도 <영웅본색> 간판의 주윤발 그림은 주윤발이라기보단 기태의 얼굴을 닮았다.
그리고
이한위, 신신애 배우의 연기는 그들이 보여줬던 이전의 이미지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정점을 보여준다.
이동휘 배우는 그가 보여줬던 이전 이미지와 꽤 닮아 있어 매우 적절하고,
이상희 배우의 연기는 놀랍도록 현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