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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Mar 15. 2020

한 승무원의 못된 손버릇

왜 이러고 살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예,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지요. 저도 분명 잘 먹고 잘 살아보자고 이 비행이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 비행에 탑승한 승객들은 도착지까지 버티기 위해 기내식을 먹고요.


항공사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항공사는 중장거리 노선에서 기내식을 제공합니다. 메뉴는 2~3종류로 다양한데요.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 같은 경우에는 대개 한식과 양식으로 나뉩니다. 일본항공사인 우리 항공사는 일식과 양식으로 마련돼 있지요.


이번 비행 첫 번째 기내식 메뉴는 [일식 메뉴 : 흰 살 생선 덮밥]과 [양식 메뉴 : 햄버거 도리아]로 구성돼 있습니다. 저는 승객들에게 메뉴 선택을 여쭈어보고 배부해 드리기에 앞서 제가 먹고 싶은 메뉴를 조심스레 '찜'해둡니다. 비행 전 든든히 아침을 챙겨 먹고 나온다고 하긴 했는데, 벌써부터 출출해서요.


아침 먹고 서둘러 화장을 하고, 그날 함께 비행할 동료 승무원들끼리 사무실에 모여 브리핑을 한 다음 비행기에 탑승해서는 항상 그렇듯이 탑승 시간에 쫓기며 부랴부랴 승객분들을 맞이할 탑승 준비와 이륙 후 바로 시행될 서비스 준비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승무원들은 정작 본격적인 서비스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허기짐을 느낍니다.  


자! 그래도 우리 승객분들께서 기내식을 드시고 난 후에 기내에 탑재된 모든 음식을 입에 털어 넣을 기세로 처먹을 수 있는 시간이 올 테니, 힘을 내서 기내식사 서비스를 시작해야겠습니다.


한 비행에 실리는 기내식은 그날 탑승하는 승객 인원 수보다 조금 많은 양으로 준비됩니다. 남은 기내식은 저희 승무원들 차지가 되지요. 보통 한 메뉴로 선택이 쏠려 전부 소진되면 선택받지 못한 메뉴뿐이지만요. 대한항공은 비빔밥이 압도적인 인기로 승무원들은 구경도 잘 못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번 비행에서는 [흰 살 생선 덮밥]과 [햄버거 도리아] 중 제가 먹고 싶은 메뉴인 햄버거 도리아를 남기기 위해, 저는 승객분들께 열과 성을 다해 흰 살 생선 덮밥을 추천해 드릴 겁니다.



“손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메뉴 일식으로는 고슬고슬한 쌀밥 위에 부드러운 흰 살 생선을 얹은 흰 살 생선 덮밥이 있습니다. 일식을 하시게 될 경우 따뜻한 야채수프를 함께 제공해드립니다. 또한 사이드 메뉴로 미니 소바가 있어서 면 요리도 함께 즐기실 수 있습니다. 일본 항공사인 저희 항공사의 추천 메뉴입니다.


양식으로는 햄버거 도리아가 있습니다. 양식을 선택하신다면 빵과 버터를 제공해드립니다.“


많은 승객분들은 상당히 편파적인 메뉴 설명을 들으시고는 비교적 맛있게 보이기도 하고 들리기도 하는 메뉴인 흰 살 생선 덮밥을 선택합니다. 역시. 햄버거 도리아, 편파적, 성공적입니다.


이 기세대로만 간다면! 햄버거 도리아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열성적으로! 편파적인!! 메뉴 설명을 백 번 가량  계속하다 보니 목이 마릅니다. 대놓고 한쪽으로 치우친 친절한 메뉴 설명에도 불구하고 굳은 심지로 햄버거 도리아를 시키는 승객분도 계신데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햄버거 도리아와 함께 맥주 캔을 따서 드리는데, 치익 하는 소리와 동시에 맥주 캔에서 거품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니 침이 꼴깍 삼켜집니다. 조금 전에는 캔에서 넘쳐흐르는 거품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가져다 대는 만행을 저지를 뻔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알 리 없는 승객분께서는 제 손에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맥주를 무심히 받아 꿀꺽꿀꺽 시원하게 집어삼키며,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무는데요.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집니다. 아차, 이러면 안 되지요. 아직 다음 줄, 다다음 줄의 손님들이 저를 애타게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승무원 미소를 자동으로 장착하고 다음 줄에 앉은 승객에게 다가가 메뉴 설명을 드립니다.


어찌어찌 모든 기내식을 배부하고 남은 수량을 확인합니다. 아! 햄버거 도리아, 편파적, 성공적입니다. 햄버거 도리아가 4개나 남았습니다. 이제는 안심하고 서비스 마지막까지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되겠습니다. 승객분들께 디저트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나눠드리고, 따뜻한 음료로 녹차 커피 홍차까지 여쭈어보며 식판을 회수하면 끝입니다. 식후엔 역시 아이스크림이죠. 저희 회사에서는 식후 디저트로 하겐다즈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제공하는데요. 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커피를 조금 부어서 섞어 먹으면 하늘 위에서 달콤 쌉싸름한 아포가토를 즐길 수도 있습니다.


그나저나 한 시간 반 동안 200여 명의 사람들이 맛있게 식사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허기가 집니다. 그렇게 주린 배를 움켜쥐고 겨우겨우 첫 번째 기내식 서비스를 마쳤습니다. 드디어 갤리에서 쭈그리고 앉아 햄버거 도리아를 한입 크게 베어 뭅니다. 아, 이 맛입니다. 고된 노동 후에 입에 털어 넣는 곡기는 무엇이라도 맛있겠다만 제가 정성을 담아 맛없어 보이게 설명한 햄버거 도리아를 먹자니, 승객들로부터 뺏어 먹는 음식처럼 참 맛있습니다. 어떤 음식이든 한 입 뺏어 먹는 음식이 제일 맛있게 느껴지는 법이잖아요.


승무원들이 갤리에서 커튼을 치고 작은 간이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는 이 타이밍에 커튼을 열어 재끼는 승객 분도 종종 있습니다. 저희가 옹기종기 쪼그려 앉아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면 좀 초라해 보이겠지만, 저희에게는 꿀 같은 휴식시간입니다.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디저트로 아까 제가 말씀드린 아포가토까지 야무지게 만들어 먹었습니다. 배가 불러와 살며시 유니폼 치마 단추를 끄릅니다. 위에 카디건을 입으면 안 보일 테니 괜찮습니다.


승객들을 위한 첫 번째 식사 서비스와 함께 저의 첫 번째 기내식사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이제 저는 두 번째 기내식 메뉴를 기웃거리며 착륙 전에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합니다. 죽이랑 오므라이스가 있네요. 그러고 보니 이틀간의 래이 오버 동안 호텔에서는 무엇을 먹을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호텔 근처 몰에 있는 쉑쉑버거를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호텔에서는 한국에 가면 남자친구랑 뭘 먹으러 갈지 고심합니다. 기름기 많은 기내식에 미국 햄버거랑 파스타만 먹고 있으니 얼큰하고 걸쭉한 국물의 닭볶음탕이 생각납니다. 시원한 동태찌개도 좋겠네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나 왜 이러고 살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고 먹는 일은 분명 즐거운 일인데, 너무 먹고 비행하다 또 그냥 계속 먹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한 움큼씩 집히는 뱃살을 보며 죄책감마저 듭니다. 이런 제 마음을 읽은 걸까요.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래요!”라는 후배 말에 둘이 키득거리며, 승객에게 제공하는 초콜릿을 제일 먼저 집어먹습니다.


이번 스테이 동안은 쉑쉑을 두 번이나 먹었습니다. 쉑쉑버거가 맛있기는 하지만 역시 한국인은 한식인가 봅니다.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닭볶음탕을 먹겠다는 일념 하에 남자친구와 약속을 정해두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으로 들어와 닭볶음탕을 먹고, 남은 국물에 볶음밥까지 추가해서 비벼 먹고는 뿌듯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방으로 들어와 가방을 정리하는데, 닭볶음탕 집 앞치마가 돌연 튀어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승무원은 서비스하는 시간에 앞치마를 일제히 착용합니다. 서비스가 끝나고부터는 카디건이나 재킷으로 갈아입습니다. 앞치마는 다음 비행을 위해서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고, 자칫 다른 승무원 앞치마를 잘못 가져가면 안 되니 서비스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기 가방에 고이 넣어둡니다. 그 습관 때문일까요. 어느새 저희 집에는 감자탕 집 앞치마, 부대찌개집 앞치마, 닭갈비 집 앞치마까지 세 개나 있습니다. 오늘 가져온 닭볶음탕 집 앞치마까지 이제 네 개가 되어버렸군요. 나중에 가게 근처에 가게 되면 돌려드려야지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아예 날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회사 선후배들끼리 모여 식사를 했습니다. 수다를 떨며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가방에 꾸역꾸역 넣는 제 모습을 선배님이 보고는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해서 순간 다 같이 폭소를 한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재빠르게 앞치마를 챙기는 습관이 나쁜 손버릇으로 변모했다고 다 같이 웃으며 눈물마저 찔끔 흘렸는데, 오늘 제 남자친구는 저의 빠른 손놀림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나 봅니다.



식당 앞치마를 입지 않고서도 빨간 국물이 튀어도 괜찮게 검은 옷이나 빨간 계통의 옷을 입고 먹으러 나가야 할까요. 이 못된 손버릇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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