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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Mar 18. 2020

첫 번째 승무원 동기

네가 내 첫 번째 승무원 동기이자 친구로 있어준다면

                                                                                                                       

승무원이 되었다고 말했을 때, 난색을 표한 친구들이 더러 있었어. 여자들 텃새가 심할 텐데... 항공사는 시니어리티가 어마어마하다고 하던데... 괜히 콧대만 높고, 사치 부리고... 네가 잘 버틸 수 있을까? 혹은 너도 변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말들 있잖아. 나 역시 승무원을 준비하면서 짐작하고 생각해봤던 부분이기도 하니까 듣기 거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달갑지는 않은 그런 말들. 합격했다고 기쁜 마음으로 신나게 내뱉은 말이 무색하게끔 재를 뿌려버리는 그런 말들.


그런 부류의 사람을, 그들이 구사하는 화법을, 너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 나도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잘 보이기 시작했거든. 걱정하는 척, 위하는 척. 척척하며 하는 말이지만 그 저변에 깔린 시샘과 두고 보겠다는 심보를 모르지는 않았어. 너는 어려서부터 많이 보아왔겠지 그런 사람들을. 한눈에 띄는 외모도 그렇거니와 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행로가 남달랐던 만큼.


아나항공 승무원 합격 통보를 받은 후였지.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러 합격자들끼리 처음 만나는 날이었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그리 이쁘지도 않은 나는 하필이면 더 촌스럽게 화장을 짙게 하고 나갔어. 그리고 색조화장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도 족히 나의 3배는 될 것 같은 큰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너를 본 순간, 조금 주눅 들었던 것도 같아.


힐끔힐끔 너를 훔쳐보다가 네 얼굴을 전에 어디서 보았는지 떠올렸어. 내가 자주 구경하는 인터넷 쇼핑몰 모델인 너를 퍼뜩 알아챈 거야. 쇼핑몰 모델이니까 포토샵으로 다리를 늘리고 날씬하게 만든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네 다리는 좀 비정상적으로 길고 얇아서 놀랐었어. 그러고 보니 면접장 화장실에서 너무 말라 보이면 안 된다며 스타킹을 3개씩 신던 지원자가 너였더라고. 나는 장딴지라고 불리는 종아리를 가리기 위해 압박스타킹을 신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너를 조금은 재수 없게 여겼어.


그런 너와는 나이가 같아 사번이 앞뒤로 주어졌고, 일본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에는 사번 순으로 기숙사 방을 배정받았기에 옆방을 쓰게 됐어. 비행을 시작하고서도 비행이 앞뒤로 자주 겹쳤고. 아나항공에서 했던 비행을 즐겁게 추억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고 말이야.


나이트 크루즈에서 바람을 맞으면서 시원한 맥주를 한 손에 들고는 목을 젖혀가며 웃었던 시카고. 워싱턴 쇼핑몰을 몇 번씩 돌며 서로 옷을 골라 주다 지쳐 초코 아이스크림을 우적우적 먹는데, 이미 기내에서 아이스크림 6개나 해치웠단 얘기를 부끄러운 듯이 했던 너를. 다음 뉴욕 비행에서는 클럽에 가자고 했더니 지도에 클럽 위치를 빨간 동그라미로 몇 개씩이나 표시해두고 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너도. 지금 생각하면 총에 맞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다 싶을 만큼, 미국 밤거리를 겁도 없이 돌아다니며 깔깔댔던 우리를. 미국 비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와 호텔 침대에서 모스버거를 먹다가 갑자기 신나는 노래를 틀어놓고 서로에게 스트립쇼를 하던 우리가 있었는데.


그러다 돌연 승무원을 그만두고 아나운서 하겠다는 너를, 나는 반기지 못했어. 동기로 너를 잃기 싫었던 마음도 있었고, 내가 살아온 세계에서는 아나항공 승무원이란 직업도 굉장히 좋은데 너는 왜 또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나 싶었어.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승무원이랑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니까. 그런데 가만 보니 너는 미대를 다니면서 대학생 시절 내내 모델 일을 했고, 노래를 맛깔나게 불러 트로트 가수 제의도 들어와 고려하더니 승무원 하겠다며 승무원 학원을 다니다가 아나항공에 합격한 거였어. 그렇게 도전을 서슴지 않던 너는 내 아쉬운 소리에도 불구하고 4년 동안 잘 다니던 아나항공을 그만두더니 아나운서 준비에 돌입했어. 지금도


왜 그때 네 편에 서서 지지해 주지 못했을까... 생각하곤 해. 걱정하는 척 위하는 척, 척척하며 내게 쏟아지던 말들을, 내 의욕을 순식간에 가라앉히던 그 말들을 나도 네게 똑같이 했던 거잖아. 옹졸했던 내 속내를 그때 다 들켜버린 것 같아서 아직도 가끔 네 앞에서 괜히 민망할 때가 있어. 왜냐면 너는 지금 보란 듯이 매일 생방송으로 경제 뉴스 앵커를 해내고 있으니까. 나는 때때로 내 주위 사람들에게 네 영상을 보여주며 나랑 같이 비행했던 친구라고, 나랑 친하다고 으스대곤 하니까. 그때


속 좁게 굴었던 나와는 달리 너는 자주, 많이, 나도 몰랐던 나의 좋은 점을, 내가 개발해야 할 부분을 짚어주곤 해. 그럼 나는 닥치라고 말하면서 변명을 늘어놔. 야,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은 너무 많아. 이 정도 실력 가지고 밥벌이할 수는 없다고. 그런 대화를 나누는데 너는 내게 반문했어. 그럼 나는? 그때 나는?


그래서 요즘 나는 이럴 때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드문드문 생각을 하는 거야. 너라면 단호한 태도로 어떻게 할지 너무 잘 알겠거든. 나는 주저하고만 있는데.


어제는 너네 회사 앞에서 방송을 막 마치고 나온 너와 차를 마셨어. 하얀 정장 원피스에 방송용 메이크업을 한 네가 눈부시게 예뻐서 나는 계속 예쁘다를 연발했고, 네가 입고 있던 원피스 쇼핑 링크를 받아 그 자리에서 바로 따라 샀지. 화장실 갔다 오는 길에 앉아있는 너를 보는


방향을 틀어 나아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렇게 도전해보려는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기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인지 나는 기억해냈어.


자신이 없어서, 혹은 자신은 있는데 돈이 없어서, 혹은 돈은 있는데 여건이 마땅치 않아서, 혹은 돈도 있고 여건도 되는 데 그 이상으로 노력해야 할 시간이 엄두가 안 나서, 우리는 자주 자신의 한계를 먼저 깎아내리곤 해. 그리고 그냥 살아가는 거지 뭐.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착각하면서. 우물 안에 앉아서 이 세계가 전부이고, 나는 원래부터 이렇게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야.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이제는 요리조리 방향을 틀어보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친구에게 그리고 나에게, 적어도 먼저 찬물을 끼얹지는 않으려고 해. 무언가를 욕망하려면 최소한 접해보기라도 해야 하는데, 제대로 접해보지도 못한 세상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참 딱해 보이는 일이니까.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더 깊게 접해가며 살고 싶단 생각이 들어. 아직 요원하게만 느껴지는 삶의 형태지만, 네가 내 첫 번째 승무원 동기이자 친구로 있어준다면, 어쩌면 그렇게 멀지만은 않겠다는 생각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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