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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Mar 18. 2020

한 승무원의 못된 손버릇 2!

우리 집이라고 여기는 비행기에서


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승무원으로 비행만 시켜준다면 월급 받지 않아도 넙죽 엎드려 감사히 비행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뭣도 모르던 시절이요. 그때는 승무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 너무 컸던 거지요. 지금은 비행이 많이 나오면 힘들다는 투정을 부리고, 비행이 적으면 다음 달 월급 걱정에 불평불만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지요. 불교에서도 이르기를 1초, 그 순간적인 찰나에도 1200번에 거쳐서 마음이 일어나고 멸한다고 합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내 마음도 내가 몰랐던 때가 참 많잖아요.


그래도 비행시간이나 월급에 괘념치 않고 비행하는 것만으로 신나고 유쾌했던 신입 승무원 시절도 있었습니다. 한 소녀 승객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아직도 기억나는 데요. 승무원 언니들은 비행기에서 먹고 자느라 많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물어보는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비행기가 집인 승무원 언니들은 언제 부모님을 만나러 비행기에서 나오고 병원은 어떻게 가는지에 대해서 그 소녀 나름대로는 심각한 고민을 해본 질문들이었죠. 소녀 딴에는 비행기에 타면 항상 승무원 언니가 있으니까 아마도 저희 승무원들이 비행기에서 산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엉뚱하지만 귀여운 소녀의 편지였습니다. 비행기가 집이라... 그러고 보니 비행 가는 날이면 현관 앞에서 엄마가 제게 하던 말이기도 하네요.

비행기가 네 집인 것처럼 일해라~ 내가 이 비행기의 주인이다~ 그리 생각하고 일해야 한다~

네 비행에 탄 승객들은, 다 우리 집에 초대된 귀한 손님인 거야~~


물론 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비행 나가기 직전에는 혹시나 뭐 하나라도 빠뜨리고 나갈까 봐 정신이 없고 분주하거든요. 하지만 저희 엄마 역시 해야 할 말은 계속하는 스타일이라 제가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나서면 등짝에다 마지막으로 꿋꿋하게 한 번 더 외쳤습니다. 비행기가 네 집인 거여~~ 그렇게 생각해라. 알았제~?


8년 넘게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금에서야, 제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엄마의 말은 승무원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비행 초반에는 비행기에 익숙하지 않아 하늘 위 기내에서 벌어지는 특수한 상황과 환경이 낯설기만 했습니다. 대기압 차로 몸은 피로했고 거기에 시차까지 더해져 속이 메슥거리기 시작하면, 주인의식이고 나발이고 이러다 내가 먼저 죽겠다는 생각만 들었지요.


그러다 점차 땅보다 하늘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비행이라는 환경에 몸이 적응했고, 서비스를 준비하는 곳인 갤리는 우리 집 부엌보다 친근해졌습니다. 제 방에서 잃어버린 물건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온 서랍과 수납장을 다 뒤져도 도통 찾지를 못하다 나중에 책상 귀퉁이 같은 뜬금없는 곳에서 발견하거든요. 그런데 정작 기내 물품은 뭐가 어디에 있는지 귀신같이 정확하게 알아 제 몸과 손이 먼저 나갑니다. 매일 같이 타는 비행기인지라 기종마다 기내 곳곳을 샅샅이 파악했기 때문이겠죠. 비행기를 집처럼 생각하라는 엄마 말대로, 의도하지 않아도 어느새 비행기는 자연스레 마치 저의 집처럼 제 몸에 익어버린 겁니다.


그러고 보면 비행기는 정말 저의 집과 다름없고, 승객들은 저희 집에 방문한 손님 같습니다. 저는 집에 찾아온 손님께 음료나 차를 준비해 드리고 식사도 대접합니다. 손님들은 처음 방문한 집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 헤매기도 하죠. 손님께서 갑자기 머리나 배가 아프다고 할 때는 집에 구비해 놓은 비상약을 드립니다. 간혹가다 몸에 화상이나 상처를 입기라도 하면 비상 약품으로 긴급 치료를 합니다. 이 외에도 집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은 집 주인인 저와 동료 승무원 그리고 기장과의 협의하에 다루어집니다.


아무래도 제가 집 주인이다 보니, 손님맞이 이전에 집안을 청결하게 유지하려 애쓰는 것도 당연합니다. 손님들이 저희 집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즐기는 와중에도 간간이 집안 상태를 체크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러다 보니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아무 곳에나 떨어진 휴지나 쓰레기를 보면 재빨리 치워버려야 안심이 됩니다. 손님이 제 집을 불쾌하고 지저분한 곳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손님들이 식사하면서 반주도 즐기다 식곤증에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는 틈을 타 집안의 모든 조명을 소등합니다. 이내 손님들은 단잠에 빠지고, 저는 이때만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많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목이 비틀어지고 턱은 한껏 꺾였는데 입까지 목청이 보일 만큼 벌어져서 주무시는, 뭐 그런 각양각색의 모습 말입니다.

손님들이 주무시는 와중에도 저는 집주인이니만큼 마무리 정리를 해야 합니다. 부엌 정리를 마저 한 후에 혹시 미처 치우지 못한 것은 없는지 어두운 집안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닙니다.


앗! 아니나 다를까, 저기 바닥에 떨어진 휴지 뭉치가 눈에 띕니다. 휴지 뭉치를 발견하자마자, 집주인인 저는 재빨리 손과 발이 먼저 나갑니다. 빨리 치워버리려고요.


음? 그런데 휴지 뭉치가 약간 물컹합니다. 다시 한번 세게 집으며 들어 올리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합니다. 저는 설마 하는 마음과 함께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마자 다시 숙여버렸습니다. 제가 집어 든 것은 흰 휴지 뭉치가 아니라 저희 집에 놀러 온 손님이 하얀 양말을 신은 발이었기 때문입니다. 손님은 자신의 발을 잡고 있는 승무원을 내려다보며 당황했습니다. 예. 아무리 저희 집이라지만, 어두울 때는 더욱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한 날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더 이상 그런 실수는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어두운 집안일수록 더 눈을 크게 뜨고 번뜩이면서 살피니까, 그때와 같은 난감한 상황은 없을 것이라 믿었죠. 한동안 별문제 없이 비행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손님들의 취침 시간, 저는 여전히 재바른 걸음으로 집안을 활보합니다.


그런데 비즈니스 클래스 집안에 있어야 할 흰 테이블보가 이코노미 클래스 집안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즈니스 클래스 집에서는 손님에게 식사를 제공해드리기 이전에 흰 테이블보로 테이블을 평평하게 덮습니다. 그 흰 테이블보가 이코노미 클래스 테이블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아하? 가끔 이 흰 테이블보는 클래스 간에 서비스 물품을 옮길 때, 손님들 주의를 끌지 않으려 물품을 감추는 용도로도 사용합니다. 그날 이코노미 클래스 집안이 담당이었던 저는, 이 흰 테이블보가 아마도 서비스 물품을 숨기며 통로를 지나가던 다른 집주인 승무원이 떨어뜨리고 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고 에고. 심지어 손님분들이 앉아계신 테이블에 그냥 흘리고 가다니요. 빨리 치워버려야지요. 이번에도 생각을 좀 더 다듬기 전에 손이 먼저 테이블보를 향해 뻗치고 말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꺅! 하는 가시 돋친 소리가 울렸습니다. 여기저기서 손님들이 놀라 일어났습니다.

그날 비행에는 수녀님들이 단체로 탑승했습니다. 스무 명 내외로 수녀님들 모두 수녀 복을 착용하셨고, 머리에는 베일까지 완벽하게 쓴 상태였습니다. 수녀님들은 그날 저희 집 손님으로 오셨고, 그들도 사람이니 취침 시간에 다들 곤히 주무셨던 거지요.


그런데 하필, 제가 발견한 수녀님이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주무시고 계셨던 겁니다. 저는 주무시고 계신 수녀님의 곱고 하얀 베일을 비즈니스 클래스 집안의 테이블보로 착각해 그냥 막 끌어당겼던 것입니다. 수녀님은 주무시다가 수녀님의 머리를, 아니 베일을 잡아채는 저의 손길에 놀라 소리를 꺅! 하며 내신 거지요.




수녀님의 비명 소리를 듣고 주위에 함께 앉아계신 다른 수녀님들이 경계하며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그저 집안을 깨끗하게 치우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뿐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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