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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Mar 26. 2020

귤 까먹던 아저씨, 경비 일은 구하셨을지 궁금하다

                                                                                                          

 할아버지로 넘어가기 직전의 아저씨가 커피는 시키지 않고 카페에 앉아 귤을 까먹고 있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회사 일에 한창이었다. 저녁 약속까지 시간이 남아 스타벅스에 자리 잡고 앉은지 한 시간째였다. 핸드폰을 한 번 확인하고는 뻐근한 목을 돌리며 카페를 둘러보았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나는 카페를 배경으로 친구 또는 연인들이 따뜻한 차를 나눠 마시고 있었고, 나처럼 혼자 앉아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두들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 앞에는 모두 차나 커피가 담긴 잔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귤만 까먹고 있는 아저씨가 눈에 뜨일만했다. 나는 그를 일별하고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집중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아가씨..."

 귤 먹던 아저씨였다.

 "네?"

 "아가씨. 나 좀 도와줘요. 바빠 보이는데 미안하지만..."

 "아, 아니에요. 무슨 일인데요?"

 아저씨는 머뭇거리면서도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 저.. 내 핸드폰에 사람인이랑 리크루트 좀 설치해 줘요."


 나는 주저하며 서있는 아저씨를 일단 내 앞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의 핸드폰에 사람인이랑 리크루트 어플을 다운로드해 주었다.


 "다 받았어요. 여기요."

 아저씨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그럼 여기서 이제 경비를 검색하면 되는 건가요?"

 "경비 일을 하고 싶으신 거세요? 검색창에 '경비'라고 치시면 돼요. 보세요."


 경비라고 입력하자 이천 건이 넘는 구인 정보가 나왔다. 나는 어느 지역을 원하시냐고 물었고 아저씨는 강서구 지역에서 일하고 싶다 했다. 강서구로 지역 선택을 하자 사십몇 건의 검색 결과가 떴다. 여의도 빌딩 관리, 산부인과 시설 소장, 홈플러스 시설 팀장 등 다양했다. 아저씨는 한 톤 더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와, 많네!" 반가운 기색이었다.

 "네. 원하는 곳으로 지원하시면 돼요. "

 "고마워요. 고마워. 그럼 이제 여기 나오는 회사 주소로 찾아가서 이력서 내면 되는 거지?"

 "네? 아니에요. 즉시지원 보이시죠? 이력서를 사람인에 등록해놓고 지원하기 버튼을 누르면 되는 거예요."

 "..." 아저씨는 얼굴에서 들뜬 기색을 거두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표정만 보아도 그가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저씨는 뭐라고 말하는 대신 손에 접혀있던 종이를 펼쳤다. 종이에는 '사람인으로 경비직 지원하기' 과정이 자필로 적혀 있었다. 마포구청에서 적어준 거였다. 내 말도 못 알아들으시는 데 종이에 적힌 내용만으로 아저씨가 혼자서 '지원하기'까지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이게 그 말인가...? 도통 모르겠어서......" 아저씨는 고개를 숙여 핸드폰 액정과 마포구청에서 적어준 종이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는지 만나기로 한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선배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한 뒤, 아저씨와 몇 개의 과정을 더 거쳤다. 사람인과 리크루트에 본인인증을 하고 회원가입까지 했다. 이력서 등록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력서 등록은 사진도 첨부하셔야 하고, 경력사항이랑, 자기소개서도 작성해서 올리셔야 해요. 제가 지금 다 해드릴 수는 없고요, 해보다가 어려우시면 다시 구청에 가서 도움 요청해보세요."

 "예. 고마워요. 시간 빼앗아서 미안하게 됐어요."

 "아니에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나는 그를 내가 앉은 자리에 남겨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짐을 챙겨 스타벅스에서 나오는 길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과 부딪혔다. 나는 선배를 만나 역시나 트리 장식이 있는 레스토랑에서 파스타와 리조또를 먹고 헤어졌다.


 그 후부터일 것이다. 유독 잘 보이기 시작한 모습들이. 분식점 매장의 무인 판매기 앞에서 망연히 서있는 할머니가 보였고, 온라인 주문을 하지 못해 굳이 시장에서 장을 봐 끙끙대며 들고 가는 할머니가 보였다. 비행하러 공항에 가면 셀프 체크인이나 백드롭 라인에는 모두 젊은이들만이 서있었다. 백드롭은 사전에 셀프 체크인을 한 승객들이 수화물을 부치는 곳인데, 길게 줄을 서서 짐을 부치고 표를 받는 일반 체크인 카운터 대신 셀프 체크인을 이용하면 3분 만에도 간단히 탑승권을 받을 수 있다. 공항 탑승권 자동발급기인 키오스크를 이용하지 못하는 노인들은 대개 이런 서비스가 있다는 것도 모른다. 알더라도 능숙하게 사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디지털 소외다. 노인에 대한 사회적 배려는 단순히 무료 독감예방접종, 교통비 지원, 기초연금 지원 확대에서 그치면 안 된다. 건강 비용을 대주고, 공짜로 차 태워주는 일은 편성된 노인예산을 돈으로만 급하게 때우는 복지 정책일 뿐이다. 기술 발전의 속도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이때에 노인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일은 디지털을 '잘 아시게' 하는 일이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의 디지털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55세 이상 장노년층의 종합적인 디지털정보화 수준이 가장 낮다. 노인들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인프라 환경은 갖춰졌지만 이를 이용하는 방법은 잘 모른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보화교육 관련 예산은 지속해서 줄고 있고, 정보화교육 강사의 고용과 처우도 형편없다. 예산의 한계로 정보화교육을 지원하는 대부분의 보조강사는 자원봉사자들이다. 나는 정보화교육 관련 예산을 증대하고 강사의 고용과 처우도 향상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또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다. 대신에 나는 나부터 정보화교육 강사라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했다. 그게 더 빠르고 효과가 있을 거라고 믿어서다.  


 56년 생인 우리 엄마만 해도 모바일로 예약하고, 예매하고, 주문하는 일을 어려워하신다. 하다못해 카카오톡도 침침한 눈과 둔해진 손놀림으로 오타 나기 일쑤다.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는 주고받지만, 선물하기 기능은 꿈에도 모르고 있다. 노인을 위한 큰 글씨의 스마트폰 사용설명서 하나 없는 세상이다. 그래도 곁에서 가르쳐주는(비록 답답해하며 신경질을 내지만) 그녀의 딸인 내가 있다. 나는 지난주 내내 엄마에게 네이버페이로 상품을 주문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 새로 갤럭시 핸드폰을 산 아부지에겐 삼성페이 결제 방식을 알려주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길을 나서면 음식점이나 공항에서 또는 터미널에서 헤매고 있는 이들을 만날 수밖에 없다. 노인이나 장애인이 사용하기 어렵게 제작된 작은 글씨 크기와 높게 설치된 터치스크린의 키오스크(무인단말기) 자체에 대한 개선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들의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내가 있고 시민이 있다.


 며칠 전 출근 길에는 김포공항 롯데리아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할머니를 도와 함께 주문해드렸다. 때때로 지하철에서 경로를 물어보거나 버스 노선에 대해 물어보는 할아버지를 만나면 재빨리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알려드린다. 집에서 컴퓨터나 핸드폰으로 알아보지 못해 발로 뛰어다니는 노인들에게 조금 더 친절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고 보니 전 남자친구가 길을 물어본 할머니에게 "몰라요"라고 매몰차게 대답한 모습에 오만정이 다 떨어졌던 기억도 난다.


 길을 나서면 여전히 많은 노인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노인들을 제치며 더 빠르게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사람들은 급해 보이고, 바빠 보인다. 말 한 번 붙이기 어려울 만큼.                             


                  

교육이 시급하고 시스템부터 개선되어야 한다는 소리만 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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