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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으는 돼지 Mar 24. 2020

모피코트 걸치던 승무원

                                                                                 

올겨울, 유독 모피를 자주 입었다. 이제 나이도 어느 정도 찼으니 모피 한두 벌은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있는 돈 없는 돈을 그러모아 두 벌의 모피를 작년과 재작년에 걸쳐 장만했다. 이십 대 때는 엄마 옷을 입은 것처럼 잘 어울리지 않던 모피도 서른을 넘기고 나니 퍽 자연스럽게 걸칠 수 있었다. 모피를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꼭 한 마디씩 거들었다. 좋아 보이네,부터 시작해서 진짜냐, 얼마냐 하고. 으스대는 기분이 하나도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진짜라고 힘주어 말했고, 그러자 한 친구는 자기 건 페이크인데 역시 진짜는 다르다며 손을 들어 부드러운 털을 한 번 쓸어보았다. 우리는 한동안 진짜 모피는 윤기가 얼마나 좌르르 흐르는지 보라며, '예쁘다 예쁘지'를 연발했다.  


얼마 전에도 윤기 넘치는 모피를 입고 오래간만에 외출을 했다. 놀러나가는 기분을 내기 위해서라도 꾸미고 싶었다. 나는 쌍꺼풀이 없어 밋밋한 눈에 눈 화장을 강조하는 편이라 마스카라를 한껏 덧칠하고 나갔다. 내가 향한 곳은 여의도에 있는 고깃집으로 한우만 취급하는데 안심 부위가 특히 맛있는 집이었다. 곱게 화장한 친구들과 먹기 전에 셀카 몇 장을 찍었다. 안심은 그날도 맛있었다.


외출하지 않고 비행도 없이 쉬는 날에는 방구석에서 책을 읽었다. 올겨울도 작년 겨울처럼 침대 위에 누워 책을 읽어나가는데 이상하게 같은 결을 가진 책들이 많았다. 책에는 공장식 축산업에서 동물 학대와 구타가 얼마나 잔인하게 행해지는지에 관한 진술이 있었고, 모피 농장에서 너구리 또는 여우가 거꾸로 매달려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모습이 그려져있었다.



「아무튼, 비건」의 김한민 작가는 겨울만 되면 거리를 걷는 것이 고역이라고 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모피를 걸치고, 양모를 쓰고, 오리털이나 거위털 잠바를 입고 다녀 출퇴근 길마다 시체 무덤 사이를 통과하는 기분이라고. 이슬아 작가는 「깨끗한 존경」에서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그중 어떤 것도 자신의 식습관과 소비생활을 송두리째 바꾸지 못했는데, 「아무튼, 비건」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날부터는 절실한 마음으로 비건을 시작했다고 썼다. 「달콤한 제국 불쾌한 진실」에서는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작은 철창에 갇힌 야생동물들의 모습과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너구리가 시뻘건 몸뚱이로 바닥에 내팽개쳐져 채 마르지도 않은 핏방울이 맺힌 얼굴을 그림으로 그렸다. 예능에 나온 이효리는 채식임을 밝히며 고기 성분이 들어있는 라면을 먹지 않았다. 임수정, 김효진 같은 채식주의 연예인들은 인스타그램에 채식 식단과 레시피, 비건 레스토랑을 공유했다.


위에 언급한 책들과 작가와 스타의 이야기는 모두 올겨울에 차례차례 나를 찾아왔다. 내가 유독 모피를 자주 걸치고 다닌 올겨울에 말이다. 우연일까. 비건에 무심했던 내게도 이런 현실이 다가온 것을 보면 우연이 아니라 세상이 차츰 동물 보호에 눈 뜨고 있다는 반증이라 생각한다.



비닐봉지 대신 재사용 가능한 장바구니 백을 들고 다니고, 플라스틱 컵을 쓰기 보다 개인용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플라스틱 프리 운동에 이어 '모피 퇴출(Fur Free)' 운동이 거세지고 있다. 브랜드로는 구찌, 캘빈 클라인, 베르사체, 아르마니, 랄프 로렌, 코치, 버버리가 패션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행동은 옳지 않다는 이유로 더 이상 동물 모피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19년 1월 1일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모피 생산과 판매가 금지되었다. 앞서 국가적으로 모피 생산을 금지한 곳으로는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체코, 덴마크 등 유럽권 나라가 있다. 아직 아시아에서는 전 세계 모피의 중심인 중국과 홍콩을 필두로 한국에서도 대단한 소비량을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 두 벌을 내가 맡은 셈이다.


화장품 동물 실험도 실상을 알고 나면 참혹하다. 토끼는 눈물의 양이 적고 눈을 자주 깜빡이지 않아 일부 브랜드에서 마스카라 출시 전 실험용으로 쓰인다. 꼼짝도 못 하는 고정틀에 갇혀 눈 점막에 마스카라가 3천 번 이상 발리는 테스트를 받는다. 토끼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목뼈가 부러지고 실명에 이르기까지 한다. 내가 쓰는 마스카라는 로레알의 메이블린 마스카라로 동물 실험을 하는 브랜드였다. 나는 토끼 눈 점막에 처발린 마스카라를 오랜 기간에 걸쳐 몇 통째 쓰고 있었다. 찾아보니 내가 쓰는 화장품 중에서 동물 실험을 시행 중인 회사는 생각보다 너무 많았다. 샴푸와 비누도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 산다면 동물 실험을 하는 브랜드일 터였다.                                               

                                                                                                                                                                                                                                                                       

내게도 어려서부터 15년을 함께한 몽실이란 강아지가 있었다. 반려견인 몽실이가 죽고 나서 나는 동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살았다. 아니지. 몽실이를 키우면서도 개고기를 어떻게 먹어,라고 말하면서 돼지고기와 소고기는 입에 잘도 처넣었다. 동물을 생각하지 않아도 별 탈 없이 이어지는 일상이었고 나는 그 일상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난 일상에서 내가 단 하루라도 동물에게 의존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내가 동물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그랬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이제 알게 되었다. 바로 오늘 점심부터 고기를 비롯한 햄이나 계란을 안 먹을 수는 없겠지만, 가지고 있던 두 벌의 모피를 당장 버리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인식이라도 하게 된 것이다. 알지 못함을 계속 모르고 지내는 것과 알지 못함을 알게 된 후의 차이는 천지차이다. 그간 알지 못했던 혹은 외면했던 참상에 눈을 뜬 이상 지금까지 영위해온 일상과는 다른 일상을 꾸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비건 지향 삶을 살겠다고 무턱대고 선언하며 나설 일은 아니다. 비건은 삶 전반에 걸친 문제로 동물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것을 거부한다. 음식은 물론 가죽 신발이나 가방, 좀 더 엄격하게는 꿀처럼 동물을 착취해서 얻은 제품도 거부한다. 돌고래 쇼 같은 착취 상품도 마찬가지다. 화장품도 바쁘단 핑계로 동물 실험을 안 하는 브랜드인지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고 산다면 후회할 가능성이 높다. 며칠 전 나도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브랜드의 마스카라를 사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동물 보호는 공부를 하고 기준을 세운 다음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지속할 수 있는 일이다. 비건을 시작하겠다고 감자칩과 콩고기, 비건 피자만 먹다가는 오히려 몸을 망치게 된다. 채식으로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식단을 꾸준히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비건 레시피부터 파고들어야 한다. 모피를 대체하는 인조 섬유 역시 화학 약품 사용으로 환경오염을 초래한다. 친환경 소재로 만들어져 환경 오염 걱정까지 없는 의류는 물론 파인애플 잎이나 선인장으로 만들어진 비건 가죽을 생산하는 브랜드와 제품을 알아보는 수고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언급할 수도 없을 만큼 범위가 넓은 생필품인 빨래 세제, 주방 세제, 치약, 샴푸, 향수, 화장품, 생리대, 헤어 제품, 면도 용품까지 동물들의 희생 위에 있는 제품을 멀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김한민 작가는 비건의 목적이 백 퍼센트를 이루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한다. 비건은 지구와 동물들에게 끼치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건강하면서도 윤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문유석 판사도 '문명과 폭력'이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인간에 대한 폭력을 넘어 동물에 대한 잔혹 행위에 대해서도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혹자들은 이를 비현실적인 호들갑이라고 여기지만,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범위를 나, 가족, 부족, 계급, 성, 인종, 국적의 범위를 넘어 계속 넓혀온 역사가 바로 인간이 폭력적인 본성과 싸워온 과정이다. 어느 시대에나 타자의 고통에 대해 가장 예민한 이들, 가장 '호들갑스럽게'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길거리에서 타살당할 염려 없이 일상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동물 보호를 생각하지 않고 어찌어찌 이어져왔던 일상이었고, 그 무탈한 일상을 동물들의 생명 위에 놓고 살아온 삶이었다. 그러니 어려운 일이겠다.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나 혼자 애쓴다고 변하는 건 없으니 남들 따라 편하게 적당히 즐기다 가자는 주의"로 살아온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말이다. 그래서 어렵겠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삶의 다방면에서 비건을 생각해봐야 하는 지점이 온 것이다. 오후에는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화장품 회사의 립밤을 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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