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뉴욕행 비행기로 기억한다. 퍼스트 클래스에서 근무하는 동료 승무원에게 전달할 것이 있어 기내 앞쪽으로 갔다. 퍼스트 클래스에는 승객이 몇 명 있었다. 기내는 서비스가 끝나고 조명이 꺼진 상태. 그런데 기내 한쪽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이 빛의 정체는?
동료에게 물어보니 연예인 전 xx 씨가 탔단다. 사실 성별에 상관없이 연예인에게 별 관심은 없었지만,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얼마 전 봤던지라 가슴이 살짝 설렜다.
뉴욕 도착 전 용기를 내어 사인을 부탁했다. 내 이름을 묻는 그녀.... 연락처도 알려줄까요? 뉴욕에서 체류하는 동안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시게요? 같이 뮤지컬도 보고, 자유의 여신상도 보러 가요. 센츄럴 파크 공원도 함께 산책해요. 그녀가 기내 엽서에 사인을 하는 찰나의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면서 김칫국 백 사발 마셨다.
빛이 나던 그분이 내게 주신 싸인...
2.
런던행 비행기 안에서 한 여자 승객이 나를 보고 힐끔힐끔 쳐다보며 옆에 앉은 동료와 키득키득 웃는다. 그 눈빛과 웃음이 왠지 나를 향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 : "혹시 저 아세요?"
승객 :"네 알아요. 해삐님 맞으시죠?"
당시 싸이월드가 유행이었다. 나는 비행이 끝나면 싸이월드에 비행 관련 에피소드를 올리고 있었다. 몇 년 그렇게 올리니 내 글과 사진을 찾는 사람들도 생기고, 그중에는 매번 내 글을 기다린다며 리플을 달아주는 열혈 독자들도 있었다. 그 승객이 바로 열혈 독자 중 한 명이었다. 내 글에서 런던 비행을 간다는 글을 읽고 '비행기에서 마주치는 거 아냐?' 기대했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너무 신기하다며 기뻐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 땅콩을 한 움큼 건네주며, 기내 엽서에 사인을 해주었다. "나중에 비싼 값으로 팔릴지 몰라요. 잘 간직하세요" 내가 해준 최초의 '작가 사인'이었다.
* 한국 경제 신문에서 <화제의 사이트>로 내 싸이월드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이거 기사 쓰지 말라고, 회사 허락 받아야 한다고 말렸는데, 기자가 허락도 없이 기사를 써버렸다. 꽤심한 기자님, 땡큐 베리 감사 (이게 아닌데..)
김포발 부산행 비행기에서 한 젊은 남자 승객이 승무원들을 훔쳐(?) 본다. 눈이 마주치면 살짝 시선을 떨구다가도 승무원들이 서비스를 하면 다시 쳐다본다. 눈빛이 왠지 끈적하다. 여승무원들이 이상한 사람 아니냐고 불안해한다. 내가 나섰다.
"손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본인의 정체를 들킨 듯 승객은 당황해한다. 알고 보니 '승무원 지망생'이었다. 오늘도 국내 저비용 항공사 면접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란다. 비행기에서 승무원들의 서비스하는 모습을 보면서 본인의 꿈을 다지고 있단다.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게, 직접 대화를 나눠보니 사람이 선하고 착하다. 끈적하게 느껴졌던 눈빛도 승무원이 되고 싶다는 열정이 뿜어져 나와서 그런 것이었다.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성품도 - 처음 봐서 어찌 알겠냐만 - 착해 보였다. 오랫동안 사람을 상대해온 승무원의 착각, 편견, 느낌, 촉이 그랬다.
부산 도착 후 다른 승객이 다 내리고 '승무원 지망생'은 승무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승객의 사정을 알고 난 후라 여승무원들도 적극적으로 포즈를 잡아준다. 다들 이미지가 좋다며 후배 승무원으로 들어오라고 응원해 주었다.
몇 달 후 회사로부터 칭송 레터를 받았다. 승무원 지망생 승객이 쓴 편지였다. 승무원들의 서비스가 너무 훌륭했고 본인도 승무원들을 본받아 하늘을 날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승무원 체질이구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년쯤 지났을 때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사무장님! 저 드디어 대한항공에 합격했습니다. 사무장님과 그때 승무원들이 응원해 주신 덕분에 힘을 얻고 대한항공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승무원 지망생의 카톡이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비행기에서 만나길 바란다고 답장을 줬다.
또 이 년쯤 지난 뒤 중국 가는 비행기에서 그 승무원을 만났다. 그동안 세련됨이 물씬 풍기는, 노련한 승무원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악수를 하고 그동안의 근황을 나누었다.
지금은 보석을 알아본 어느 여승무원과 결혼해서 알콩달콩 신혼을 보내고 있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는 못하지만 세계 여러 도시들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 카톡에 자주 올라오는 것을 보건대 승무원으로서의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다. 가끔 와이프랑 찍은 사진도 올라오는데, 조만간 가족이 하나 더 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짧았지만 긴 인연으로 남는 승무원 후배다.
비행기에서 만난 승무원 지망생, 지금은 같은 하늘을 날고 있다.
1. 승무원으로 비행을 하다 보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알려진 유명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도 유명이기 전에 승객이고, 프라이버시가 보호되어야 할 개인이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탔다고 너무 좋아하거나 티를 내지 않도록... 그럴수록 더 불편해한다.
2. 나는 개인적으로 연예인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연예인 승객이 타도 별 감흥은 없다. 집에 TV도 없고, 그래서 TV를 안 본 지 십 년도 넘어 요즘 '핫'한 연예인이 누군지도 모른다. 동료 승무원들은 누가 탔다고 술렁거리는데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아무 생각 없다.
3. 물론, 내가 꼭 한번 봤음 하는, 내 맘속 우상 승객들이 있긴 하다. 그런 승객들이 내 비행기에 탔을 땐 나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그 승객에게 서비스를 할 때는 손이 떨린다. 그런 모습을 보고 동료 승무원들이 "누구냐"라고 묻는데, 내가 알려주면 그들은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누구지?" 대부분 그 승객의 정체를 모른다.
4.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나의 우상 승객은 '작가'다. 내 마음을 들뜨게 해 주던 책, 내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던 책, 내 마음을 치유해 주던 책의 저자들이 비행기에 타면 나는 그분들을 가까이서 봤다는 사실만으로 하루 종일 행복하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그분 옆으로 가서 "선생님이 쓰신 책의 독자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라고 조용히 인사를 드린다. 베스트셀러 작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책 저자들은 일반 사람들에게 그렇게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내 인사를 받고 오히려 그들이 '나를 알아봐 주다니'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경우도 많다.
5. 혹시 나중에 내 비행기에 타시게 되면 아는 체해주시길... 싸인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땅콩을 한 움큼 드리겠습니다. (최근 땅콩에서 '스낵믹스'로 바뀌었다. 땅콩이 워낙 유명해져서 품귀 현상이 발생했나? 실제로는 땅콩 알러지 때문에 바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