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장편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일본 지방대 강사로 일하는 설영에게 어느 날 ‘셜록’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셜록은 6년8개월 전 연락이 끊긴 친구다. “죽은 아버지. 아니, 죽은 마녀. (중략) 도둑신부와 원본 없는 세상. 1948년, 1963년, 다시 2016년, 2017년.” 셜록으로 불렸던 친구는 탐정소설 마니아답게 알쏭달쏭한 문장과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보내온다. 한편 강남에서 성형외과의로 일하는 연정은 가끔 죽은 딸 도영의 환영을 본다. 성범죄로 목숨을 잃은 도영은 탐정소설을 좋아했다. 설영과 연정은 관계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셜록’이라는 교차점에서 만나게 된다.
셜록이 설영과 함께 연구했던 논문 주제는 ‘배제된 여성문학, 빨치산 문학’이었고 이들은 취재차 일본에서 한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빨치산들과 생활했던 할머니는 당시 기억을 미래의 여자들에게 덤덤히 들려준다. 빨치산과 남한 경찰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사랑하는 이의 손을 놓고 떠나야만 했던 이야기를.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피해자 가족인 설영과 연정이 ‘셜록’의 단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피해자 연대를 그린다. 청소년부터 노년에 이르는 퀴어와 여성의 목소리는 묻히지 않고 미래의 여성에게 전달된다.
왜 피해자들만 서로를 안아줄까. 왜 같은 폭력이 반복될까. 피해자들이 죽어버렸는데, 그들을 위해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뉴스를 보며 답답했던 마음은 소설을 읽어도 해소되지 않는다. 그 대신 원본과 아름다움에 대한 의문, 트랜스젠더와 인터섹스를 위한 성형학, 빨치산 여성 생존자의 역사 기록 배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의의 소재들을 펼쳐놓는다. 흩어져 있던 점들은 결국 만나지만, 문제 해소를 향해 나아가진 않는다. 소수자 혐오 폭력과 불법 촬영, 청소년 퀴어 성폭력에서 우리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사연 있는’ 사람으로 거기에 남는다. 이 소설을 꼭 읽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지만 아마도 그들은 읽지 않을 것이다. 읽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만 읽으며 가슴 아파하겠지. 그러나 서로를 아까워하고 그리워하며 연인이 되고 친구가 되었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우리를 보듬어야만 할 것이다.
나쁜 놈만 이기잖아요
“셜록 홈스 만든 코넌 도일이요. 원래는 의사였대요. 그런데 경찰을 못 믿어서 직접 추리해보기로 하다가 결국 추리소설 쓴 거래요. 난 그래서 추리소설이 좋더라. 탐정도 좋고. 현실에서는 맨날 나쁜 놈만 이기잖아요.”
그러면서 도영이는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연정의 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그래서 사실 코넌 도일의 분신은 셜록이 아니라 왓슨이래요. 기록하는 자.”(152~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