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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송희 Jul 05. 2022

을지로 골목서 “현대미술의 구경거리가 된 기분”

우리는 다른 차원에 살고 있어


자신이 얼마나 지독하게 홀로인지, 사회에서 1인 가구는 어찌나 쉽게 핍박의 대상이 되는지를 탐구(?)해 나갔던 ‘이런 홀로’ 코너에 글을 쓴 지도 3년이 넘었다. 그사이에 내가 2인 가족이 되거나 코너가 사라지거나 할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둘이 되기도 전에 마지막 원고를 쓰는 상황이다.


사실 <한겨레>, 그리고 ‘이런 홀로’라는 코너의 성격상 1인 가구로서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주제의 한계가 있다고, 연재 초반에는 생각했더랬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혼자야!”를 외치는 글을 쓴 덕분에 되레 혼자가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조각조각 글을 모아서 고맙게도 책을 내고 독자를 만나기도 했다. 다만, 과거에는 나만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 혼자라고 느낀다. 혼자 살아서가 아니라, 그냥 세상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고립시키는 방향으로 ‘나쁘게’ 변하고 있다. 코로나19 탓을 하고 싶지만, 가장 쉬운 게 그 탓 아니겠는가.


을지로 골목에서


“나 지금 이상해, 완전 현대미술의 구경거리가 된 기분이야.”


을지오비(OB)베어 집회 현장에서 피켓을 들고 앉아 있던 친구가 말했다. 수년 전 함께 서울 서촌의 족발집 건물주 횡포에 맞서는 문화집회에 함께했던 친구들과 이번에는 을지오비베어 집회에 나갔다. 설명을 하자면, 우리가 노가리 골목으로 부르는 을지로에서 42년간 장사하며 골목의 정체성을 만들어온 것이 바로 을지오비베어인데, 최근 이 골목에 위치한 건물들을 ‘호프’라는 사업장에서 야금야금 사들여 기존 업장들을 내보내고 있다. 을지오비베어 역시 오래된 간판이 진즉 떼어졌다. 그 골목의 역사를 만들어온 가게는 따로 있지만, ‘힙’한 거리가 되자 뒤늦게 자본이 들어와 골목의 정체성을 빼앗는, 도심에서 자주 일어나는 약탈적 현상이다.


건물주에게 원하는 월세를 낼 테니 이 골목에서 함께 장사하게 해달라고 대화를 요청했지만, 건물주가 고용한 용역이 들이닥쳐 강제집행이 시행됐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물주가 나가라면 나가야지. 왜 못 나가겠다고 시위야? 장사가 그렇게 잘됐다며 여태 건물도 안 사고 뭐 했대?”라는 사람. “주변이 다 호프인데, 굳이 여기까지 다 먹어야 속이 시원하냐?! 같이 장사 좀 하면 안 되나?” 물론 양쪽 다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사회는 원래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선택을 하고 자기 계층에 따른 결정을 하며 어우러져 사는 거니까. 싸우기도 하고 대화를 하기도 하고, 타협과 절충, 혹은 투쟁을 해 가며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니까.



나와 친구들이 노가리 골목에서 ‘현대미술의 전시품’ 혹은 한국 사회의 상징적 장면 같다고 느낀 것은 지나가면서 우리를 욕하거나 건물주의 편에서 “여기가 무슨 노가리 골목이냐 골목이지!”라고 욕설을 내뱉는 시민 때문이 아니었다. 위치상 을지오비베어의 영업장은 호프의 2개 업장에 둘러싸여 있는데, 거기에 바글바글 앉아 있는 젊고 멋진 손님들이 우리를 당황케 했다.


노가리 골목은 최근 헌팅포차 골목으로도 불리는데, 정말이지 생기 넘치는 20대 남녀들이 한껏 멋을 내고 술을 마시며 정담을 나누는 모습들, 그 맞은편에서 ‘상생하여 장사하자’며 문화집회를 여는 사람들. 이들은 서로 맞서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그냥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들 같았다. 장사하는 골목에서 손님들을 불편하게 하지 말자는 게 문화집회의 성격이라 뮤지션들이 공연을 하고 디제이(DJ)가 음악을 틀었다. 누구도 불편하지 않게 조심조심.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호프 골목에 앉아 술을 마시는 젊은이들은 그들 각자의 연애와 놀이를 한다. 집회라는 행위에 불편함과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과, 그럼에도 이걸 해야만 하는 다른 평행세계가 을지로 골목에 나란히 존재한다. 그 어떤 충돌조차 없이. 물론 호프에서 술 마시는, 어림잡아 200명은 넘을 것 같은 손님들을 탓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냥 우리는 같은 공간에, 서로 다른 사람들로 더 멀어지고 있음을 느꼈다고 고백할 뿐이다.


아몬드 봉봉을 끊었다


함께 앉아 있던 친구들에게 대기업의 노조 탄압에 맞서 단식투쟁을 했던 식품노조의 뉴스를 전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무척 높은 친구들조차도 노조원이 51일이나 단식투쟁을 했다는 것, 대기업이 제빵 노동자들의 기본 노동권을 어떻게 탄압하는지 처음 듣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어떤 뉴스에서도 그 사안을 다뤄주지 않으니까! 지금 미디어 지형은 각자 가꾸어놓은 알고리즘 안에서 듣고 싶은 뉴스만 접할 수 있다. 트위터를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보가 있고, 포털 뉴스 페이지는 인공지능(AI)으로 ‘독자 에디팅’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성향에 맞는 커뮤니티 활동을 하면 거기서만 접한 뉴스로 자기 생각이 강화된다. 유튜브 역시 알고리즘이 구독자의 취향에 따른 영상만 추천한다. 게이트 키핑으로 인해 확증편향은 강화된다.


어제 아이스크림 가게 앞을 지났다. 작은 가게에 가족 손님이 가득했다. 나는 그 좋아하던 아몬드 봉봉을 끊었지만, 아이들은 포켓몬스터 신상 아이스크림을 고를 수 있다. 알아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고 불매에 참여하지 않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만,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느꼈던 것 같은 평행우주의 아득한 감각이 다시금 찾아왔다. 우리는 여기에 함께 사는 게 맞을까.


호프에 앉아 즐겁게 술을 마시고, 포켓몬 카드를 모으고 빵이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나는 혼자 살아서가 아니라 그저 세상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각자를 고립시키고 있다고 느낀다. 초연결시대라지만 정작 누구도 연결되어 보듬을  없다. 분열하고 멀어지도록,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 않도록, 홀로 외로이 분노만 내뱉도록 우주는 쩍쩍 갈라지고 있다.


마지막은 희망적으로 사랑이나 행복, 연대나 우정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도 정해두었었다. 나는 약하고 외롭지만, 우리는 원할  언제든 함께일  있고 반드시 행복해질  있다고 쓰고 싶었다.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그렇게 쓰자. 당신은 절대 홀로가 아니고, 소수라도 분명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진 친구가 있고 우리는 반드시 행복해질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멀어지지 말아요.


*한겨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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