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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송희 Jan 21. 2023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보다 더 설득력 있는 언어가 있다면 ‘사랑할 땐 누구나 시인이 된다’일 것이다. 아니, 사랑할 때에는 평소에 무심히 넘기던 시조차도 사랑의 밀어처럼 여겨진다. 진은영 시인이 10년 만에 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지금 사랑에 빠진 이라면 애틋하게 매만지며 읽을 시집이다.


해설을 쓴 신형철 평론가는 진은영 시인을 가리켜 ‘사람들이 시인 진은영을 어떻게 떠올리는지 다 알지 못하지만 그가 무엇보다 사랑의 시인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기로 하자’라고 쓴다. 시작만큼은 모두가 들어봤을 그 유명한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시인의 사랑>)를 떠올려보라. 심지어 이번 시집 첫장을 열면 선언처럼 출현하는 시인의 말은 이렇게 쓰여 있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사랑이 연인에게 국한되는 물질이 아니라면, 진은영은 언제나 사랑의 시인이었음이 틀림없다.


시집의 이름이 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는 첫 번째 시 <청혼>의 첫 문장이다. 다음은 이렇게 이어진다.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누군가에게 시간을 주고, 소리와 과거와 미래와 비를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일까. <사랑의 전문가>는 또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장기간에 걸쳐 쓴 시가 묶인 시집은 1부, 2부, 3부로 구분되어 있으며 2부(한 아이에게)에는 세월호에 탑승해 있던 단원고 유예은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그날 이후>) 아이의 목소리로 부모를 위로하는 시를 읽으며 울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랑이란 무엇일까. 거기에는 올곧고 빛나고 윤리적이고 청순한 순간만 있지 않다. 죄책감과 미안함과 인색함으로 더럽혀진 마음까지 포함해, 그럼에도 사랑을 해야만 한다고 시는 말한다.


<그날 이후>, 48쪽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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