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푸르셰 지음 / 김주경 옮김 / 비채 펴냄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고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썼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자아가 충돌하며 나와 다른 상대를 확인하고 또 그 과정에서 몰랐던 나를 확인하기도 하는 것이 사랑이기에, 프롬은 사랑을 실존의 핵심에서 자신을 경험한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흔히들 “불이 붙었다”고 비유하고, 연인이 심하게 싸울 때 “불같이 싸웠다”고 표현한다.
마리아 푸르셰는 <불>의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활활 타오르다 소멸하고, 잿더미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기까지. 불은 사랑의 모든 형태를 보여준다”고 소개한다. 사회과학 교수인 로르는 심포지엄에서 증권가에서 일하는 클레망을 만난다. 로르는 클레망의 속이 다 비칠 듯한 피부와 남자치고는 예쁘고 가느다란 손목을 보고 첫눈에 욕망을 느낀다.
로르가 남성의 육체에 욕망을 가질 때, 죽은 엄마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규범과 관습을 대표하는 목소리. 현대 프랑스 문학의 정수를 읽고 싶다면 마리아 푸르셰의 <불>은 아주 훌륭한 선택이다. 평론가들이 뽑은 가장 독창적이고 진보적인 소설, 파리 리브고슈상을 수상했으며 공쿠르상, 르노도상 등 프랑스 문학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소설은 남녀의 시점을 오가며 정염을 묘사하고, 이들이 이성애를 하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역할의 곤란을 그린다. 로르는 딸들을 홀로 키우며 고독을 느끼고 다시 욕구를 느끼는 연애에 뛰어들고 싶다. 하지만 사회학과 교수와 엄마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지칠 대로 지쳤다. 반면 클레망은 은행에서 남성성을 강요당하며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로르의 딸 베라는 학교 수업시간에 남성 위인들의 작품, 남성 철학가, 남성 왕들의 역사만 가르치는 것에 반기를 들며 여학생들을 선동해 교실 밖으로 뛰쳐나간다. 로르가 과거 세대의 여성을 대표한다면 그의 딸 베라는 다음 세대의 여성으로서 관습을 깨부수고 싶어 한다. 활활 타오르는 여성, 의무와 편견으로 소진되어 재만 남은 남성, 그리고 그 둘이 만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기만하고 괴롭히고 갈구하는 모습을 치밀하게 그린 작품이다.
책속에서
34쪽
“너는 너의 아이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행동하는 사람. 항상 의존과 분노 사이의 중간 어디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네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