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의 카레

by 김송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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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인데 잠이 안 왔어. 요즘은 계속 그래. 더워서일까. 아니, 봄부터 그랬어. 평소 같았으면 6시, 7시가 될때까지 '밤 너새끼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하면서 잠도 안 자고 뒤척뒤척 누워 있었을거야. 그런데 갑자기 "카레나 만들까" 싶더라고. 배도 안 고픈데 뜬금없지.


엄마가 얼마 전에 보내준 하지감자 한 박스가 썩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 작은 하지 감자에 싹이 돋으면 파낼수도 없고 얼마나 짜증나겠니. 새벽에 막 감자에 싹이 돋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거야. 가난한 딸내미 돈 아끼라고 감자를 한 박스나 보낸 엄마(서울에도 감자 있는데, 이상하지 식재료도 엄마가 산 게 항상 더 맛있어)한테 미안해서라도 오늘 저 감자를 내 소진하고 말리라...


끙차, 일어나서 감자를 삶았어. 너무 작은 감자라 깎는 게 귀찮아서 그냥 삶았어. 그거 알아? 감자를 조금 삶아서 벗겨내면 '감자칼'로 생감자를 벗겨내는 것보다 훨씬 쉽게 껍질을 분리할 수 있다는 거. 어쨌든, 부글부글 감자를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양파도 잘랐어. 아참. 엄마가 양파도 두망이나 보냈거든. 빨간색 망에는 양파가 6개씩 들어있었는데 그걸 두망이나 보냈으니 이것도 얼른 소진해야지. 양파를 두 개나 까서 마구 잘랐어. 어차피 내가 먹을 거고, 카레에 뭉글어질텐데 예쁘게 자를 필요 없잖아. 새벽 네시에 양파를 2개나 자르고 났더니 막 눈이 시큰했어. 울고 싶었는데 안 울고 꾹 참고 양파를 볶았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냄새, 어스름 밝아오는 부엌에 고소한 양파 볶는 냄새가 퍼졌어. 사람 사는 집에서 나는 냄새, 양파 볶는 냄새.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라도 양파만 볶으면 그 집에서는 세상 제일 맛있는 냄새가 날 거라고 확신한다. 양파를 2개나 넣었더니 냄비가 넘치려고 하더라. 아차차, 내 목적은 감자소진인데! 감자도 6개나 삶았어. 작은 감자를 벗겨서 한 냄비 넘치도록 넣고 물을 붓고 고형 카레를 툭툭 넣었지. 그때부터는 약불로 그냥 보글보글 끓여주면 될 것 같지?


노노, 그렇지 않아. 그냥 놔두면 고형 카레가 계속 뭉쳐 있고 바닥에 양파랑 감자가 들러 붙거든. 살살 저어줘야 해. 그렇게 한 참을 저어줬더니 온 집안에 카레 냄새가 퍼지더라. 그렇게 아침이 오고 있었어. 왠지 빨래도 하고 싶어서 빨래 돌리고, 카레 먹다가 고양이 간식도 주고.


근데 간식 주다가 털에 챠오르츄릅이 묻어서 이 아침에 급 목욕도 시켰어. 애는 잘 안 하던 하악질을 해댔지. 요즘 고양이가 밥을 잘 안 먹어. 더위 먹었나봐. 오랜만에 이상하게 하루를 시작했고 어떤 예감이었는지 역시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어. 울컥트랩이 곳곳에 박혀 있었고 거기 걸려서 넘어지고 채여서 그냥 주저 앉아 엉엉 울고 싶었지. 하지만 나는 새벽 다섯시에 카레를 먹었잖아. 카레를 먹고 '김어준의 뉴스공장'도 챙겨 듣고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하고 고양이 목욕까지 시키고 출근을 했잖아. 그러니까 이런 일로 울면 안 되지. 새벽 4시에 그래서 카레가 하고 싶었나봐. 이렇게 마음이 힘든 일이 생길 줄을 알고 말이야. 뭔가를 싹뚝싹뚝 깎고 졸이고 저어서 만든 맛있는 카레. 나는 그런 것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니까. 오늘은 울지 않고 무사히 넘겼고 밤에 집에 돌아오니 카레는 더욱 맛이 깊어졌어. 이튿날의 카레가 더 맛있는 건 언제나 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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